* 2016년 2월 독서모임에서 다룬 책입니다.

제목이 중요한 게 첫인상처럼 제목에서 연상을 많이 하죠. 처음 제목만 놓고 보면 작은 거짓말이 부풀려져서 뭔가 큰일이 일어나겠구나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살인사건을 언급했기 때문에, 그것과 연상시켰지만, 제목이 이상한 것 같아요. 전혀 관련이 없이, 엄밀하게 말하면 사소한 거짓말이 아니고 은밀한 비밀이 어떻게 서로 꼬여서 결말에 가서는 한 번에 터져 나오는 거죠.

이 소설은 독특한 게 추리소설의 방식을 빌립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고 끝까지 책을 놓지 않고 읽게 만드는 장치로도 쓰입니다. 시간 배열도 첫 부분에, 특정한 날의 살인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한참 전으로 돌린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차례로 배열하죠. 그러면 과연 누가 죽었는지, 왜 죽여야 했지는, 또 살인자는 누구인지? 궁금하게 되고 인물들에 대한 점점 많은 정보를 알아가는 동안 결말은 더욱 궁금해집니다. 이런 방식은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이하 개는...)와 유사성이 있는데요. <개는...>는 살인사건은 나오지 않지만 전체적으론 사라진 주교의 구르터기와 그것과 얽힌 갖가지 복잡한 사건을 먼저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범인은 항상 집사라는 추리소설의 방식도 재치있게 빌려죠. 차이점이라면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은 챕터의 뒷부분에 사건과 관련된 인터뷰를 나열하지만 <개는...>은 챕터 앞부분에 사건의 개요를 짤막하게 정리해 높습니다. 그래서 독자가 소설 안의 사건과 인물들에게 더 집중하게하죠. 이런 방식으로 서술한 것은 작가가 어떤 의도로 한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조금 더 편안하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주제는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죠. 미혼모, 가정폭력, 등등 아주 까다로운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의 첫 부분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죠. 예비학교 학부모의 다소 유치한 싸움들을 수다스럽게 풀어놓습니다.


작가는 영미 베스트셀러 소설의 전형이랄까요. 수다스럽고 유머도 재미납니다. 다소 그 유머란 것이 꼭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등장할만한 혹은 미드에서 자주 봐왔던 거죠. 익살스러운 영미 소설이 대부분 비슷합니다. 유머코드나 등장인물이나 사건의 유사성이 많죠.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단점은 좀 진부하는 점입니다. 큰 단점은 전체적으로 사건, 등장인물, 결말의 해소과정이 낡은 느낌이 들었구요. 특히나 결말에 가서는 즉흥적이라는 기분마저 듭니다. 물론 작가는 왜 그렇게 사건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적당한 설명을 첨부했지만, 아주 자연스럽진 않더군요.


그런데도 이 소설이 빛났던 것은 탁월한 심리묘사가 소설을 풍성하게 했다는 겁니다. 사실 인물들이 좀 전형적이긴 했습니다. 거의 모든 인물이 전형적이었죠. 앞서 말했듯이 미드에서 툭 튀어나온 인물 같달까요. 그럼에도 그런 전형적인 인물이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인 것은 작가가 그 인물의 관점에서 아주 자연스럽고 여성 특유의 섬세한 심리묘사를 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어느 순간은 정말 살아 있는 인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죠. 사실 소설에서는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이유가 등장인물들이 매우 입체적이라는 거죠. 그저 소설 속에 존제  하는게 아니라 정말 살아 숨 쉬는듯한 느낌을 주죠.


결말이 다소 아쉬웠던 건 사실이지만, 저는 해피엔딩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주제에 접근하는 작가의 방식도 마음에 드네요.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네요. 최근에 이렇게 몰입해서 소설을 읽은 건 참 오래간만이였네요. 전 개인적으론 제인과 톰의 로맨스가 좋았습니다. 다른 사건들은 모르겠어요. 나쁘지 않은데.... 유쾌한 주제는 아니죠. 그러나 우리 사회에 실존하는 문제들이기도 하구요. 조지 오웰이 한 말처럼, 작가는 그 시대에 가장 민감한 사람이죠. 그런 면에서 보자면 재미와 주제의식을 둘 다 놓치지 않았다는 것도 이 소설의 장점이 될 것 같습니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2. 21. 11:29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와타나베 이타루 저 / 정문주 역 / 더숲 출판

15년 11월 다독다담 독서 모임에서 다룬 책이다.
회원님들과 첫 감상을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결론적으로 제목이 한참이나 잘못된 번역이었다.

田舍のパン屋が見つけた「腐る經濟」
일본에서 출판된 원래 제목인데, 대충 번역하자면 '시골 빵집에서 찾은 부패하는 경제' 정도의 뜻을 담고 있다.

책 내용도 경제의 부패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자본론에 관한 설명은 매우매우 빈약하다. 때문에 시골 빵집과 자본론을 연계해서 책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그걸로 끝. 많은 실망감을 얻게 될 수밖에 없다.(특히 내가 그랬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한국 출판사가 지은 제목은 내다 버리고, '시골 빵집에서 찾은 부패하는 경제'라는 대충 번역한 제목으로 이 서평을 시작하겠다.

이 책을 관통하는 단어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부패'이다.
사전을 찾아 보면 '단백질이나 지방 따위의 유기물이 미생물의 작용에 의하여 분해되는 과정. 또는 그런 현상. 독특한 냄새가 나거나 유독성 물질이 발생한다.'라는 긴 뜻이 나오는데, 대충 '썩어서 자연으로 돌아감'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 책에서는 말한다. 돈은 혹은 자본은 부패하지 않는다고.(책에서 이 부분을 얘기할 때 데자뷰처럼 머리에 스치는 게 있는 걸 보면, 이 책의 저자도 아마 어디선가 얻어온 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저자는 그걸 빵에 빗대어 얘기를 풀어 가며 부패하지 않는 것들을 경계하고 있다.
빵이 쉽게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넣는 첨가물이라든가, 해외에서 밀가루를 수입해 올 때 상하지 말라고 치는 포스트 하비스트(post-havest) 농약* 등의 경우를 들면서 말이다.(*포스트 하비스트 농약 : 농사가 끝나고 수확한 농산물에 보관을 위해 치는 농약.)

저자는 부패는 자연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것을 이윤을 얻어 자본을 늘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잘못된 부작용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빵집에서 일하는 직원들 사이에는 콧물을 훌쩍인다든가 하는 직업병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가 밀 알레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밀 알레르기가 아니라, 밀을 수입할 때 치는 포스트 하비스트 농약 때문이라는 얘기를 책에서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본인이 수입 밀을 사용하는 빵집 직원으로 일할 때는 콧물을 달고 살았는데, 국산 밀을 사용하는 빵집으로 옮기고 나서 싹 나았다는 얘기를 한다.

그리고 책 전반부에 자본론을 '살짝(아주 살짝이다)' 소개하면서 현 시대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함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는 부패하지 않는 돈과 자본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2부로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한다.(지극히 서평을 쓰고 있는 저의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1부 초반부에 저자는 본인이 부조리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중, 꿈에서 할아버지로부터 빵을 만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저자는 할아버지를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으며, 그럼에도 그 음성(빵을 만들라고 말해 준)은 할아버지의 것이 틀림이 없다고 얘기한다.

이것도 제목처럼 번역의 농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읽고 있는 입장에서 참으로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저자는 직장을 그만두고 빵을 만드는 길을 가기 시작하는데, 이 책의 2부에서부터 본격 저자의 천연재료 천연균 빵 만들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것 또한 두서없이 내용이 시간의 흐름을 앞 뒤로 왔다갔다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한층 더 내용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

'내가 지금 무슨 내용을 읽고 있는 것인가….' 정신이 멍해지고 유체이탈 독서를 하게 된다.

어찌어찌 끝까지 읽고 난 후 얻은 결론은 물이나 곡물은 물론 빵(밀)을 발효시키는 데 사용하는 균까지 이스트 같은 인위적인 첨가물이 아니라 천연의 것을 사용하여 빵을 만들어야 하며, 거기에 더해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하지 않는 자본에 의해 어그러지는 것을 작게나마 방지하기 위해 그 지역에서 재료를 구매해야 하고 직원들에게 이윤을 위한 노동력 착취가 아닌 노동에 대한 정당한 급료를 지급해야 하며, 만든 물품(빵)을 판매할 때에도 재료구입이나 직원들의 급료를 적정 수준으로 지불할 수 있도록 싼 값이 아닌 정당한 가격으로 팔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시골 빵집에서 찾은 부패하는 경제'이다.

나는 여기에 공감하지 못했다.
부패라기보단, 순환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도 순환의 개념을 언급하며 얘기하긴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순환을 부패하는 경제의 일부분으로 얘기할 뿐 부패하는 경제에 좀 더 힘을 준 느낌이었다. 반면 내가 느낀 감상은 반대로 순환이 더 큰 의미이고 경제가 부패한다는 부분은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오히려 부패가 썩어서 자연으로 돌아가 순환 사이클을 이룬다는 의미로, 순환의 일부분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더 강했다.

부패와 순환. 참으로 비슷한 뜻을 담고 있으면서도 엄연히 다른 단어.
그리고 이 단어 하나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저자에게는 본인의 천연균을 이용한 부패로 빵을 만드는 과정 때문인지, 부패라는 단어에 좀 더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빵 만드는 것과, 부패하는 경제라는 묶음이 필요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경제가 부패한다기보단 순환한다는 것에 훨씬 더 가깝다는 느낌 때문에 저자의 부패하는 경제에 대해 공감을 할 수가 없을 따름이었다.

지역사회에서 원재료를 정당한 값에 구매하고, 직원들에게는 정당한 급료를 지급하며, 만들어진 생산품은 정당한 값에 판매한다. 이렇게 하면 경제가 부패하는가? 여전히 그런 느낌은 미약하기만 하다. 반면 경제가 순환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매우 잘, 이라는 느낌이 따라온다.

하지만 어쨌건 단어의 차이는 잠시 뒤로 미뤄 두고, 기존의 부를 축적하고 늘려가는 것에 치중되어 있는 자본주의를 저자가 말하는 자본의 순환을 통해 좀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몸에 피가 한쪽으로만 흐르면 나머지 부분들이 병들고 종래에는 몸 전체가 죽음으로 향하듯이, 자본 또한 한쪽으로만 쏠리면 그건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쨌거나 이 서평의 결론을 내리자면, 이 책은 '시골 빵집에서 찾은 부패하는 경제'라는 느낌보다는, 저자 와타나베 이타루의 자서전에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본인의 가족과 친지 이웃들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고, 가정사와 가족관계, 유년기, 학창시절, 그리고 직장생활, 직장을 떠나서 시작한 빵에 대한 배움, 그리고 결혼과 출산, 스스로 빵집을 열어 가계를 꾸리기 시작한 이야기, 이후로 천연 빵을 만들기 위해 본인이 하고 겪었던 일들…, 그리고 또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한 소개, 자녀들이 동네에서 지내는 이야기, 가게 영업방침이라든가 기타 등등…….

책의 대부분의 페이지를 차지히고 있는 이 내용들을 읽어 가면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본론이라든가, 부패하는 경제는 그저 약간의 첨가물 정도의 존재감이랄까.......

그리고 나는 이 부분(자서전으로 봤을 때의 이 책)에 있어서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잘못된 제목 번역인 '시골 빵집에서 굽는 자본론'이라거나, 저자가 좀 억지로 엮은 듯한 '부패하는 경제'에 대해서라면 크게 느끼는 바가 없지만,
천연균을 이용한 빵의 장인 와타나베 이타루의 이야기는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동네의 전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도시와는 다른, 천연으로 빵을 만드는 장인이 살고 있는 곳답게 고전과 자연이 살아 숨쉬는 작은 도시의 풍경과, 그곳에서 묻어나는 천연균을 이용해 구운 빵의 향기는 책을 통해서만으로도 그곳 고유의 독특한 낭만과 정취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의)아이들의 천진과 밝음이 보기 좋았다.

그런 곳에서 가족들과 단란하게 살면서, 본인이 지향하는 천연균과 빵의 길을 걷는 장인의 모습은 그 존재만으로도 감명을 주는 면이 있다.

그렇지만 역시 꿈과 할아버지 이야기라든가, 본인의 경험만으로 포스트하비스트의 부작용을 확정 짓는 듯한 늬앙스를 주는 부분 등, 보기 불편한 부분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부분들만 제외하면 와타나베 이타루라는 천연균 빵의 장인의 자서전이라는 의미로는 매우 괜찮다고 본다.

서평 끝.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2. 2. 18:38

제임스 워드 (지은이) | 김병화 (옮긴이) | 어크로스 | 2015-10-21 | 원제 Adventures in Stationery: A Journey Through Your Pencil Case (2014년)

* 아르하입니다. 따끈한 새책 서평 올려봅니다.ㅎㅎㅎㅎ

 

이 책은 소위 시쳇말로 문덕을 위한 책이죠. 표지를 딱 봐도 그런데... 여기서 언급되는 유명 문방구들을 써봤거나 가지고 있다면 당신도 문덕일겁니다. 예를 들어 몰스킨이나 파커나 펠리칸 만년필, ​블랙윙이나 스타빌로 연필이라던가, 트로닷 스템프라던가, 각종 포스트잇같은거요. 우리가 흔하게 쓰는 문구들인데 보통은 관심이 없죠. 이런 형태의, 이런 방식의 문구를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런 이야기인데, 저는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당연하게도 저는 문구에 관심이 많거든요. 저는 책장으로 둘러쌓인 서점이나 음반샵, 비디오가게(지금은 사라졌지만요.) 가판대 가득 문구가 가득 진열된 문방구나 화방에 들어가면 그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죠.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고 예쁜건 하나씩 사 모우는 것도 좋아합니다. 문구를 사는 건 최초 필요에 의해서였죠. 그것은 대부분 학생 시절에, 혹은 사무 업무 때문에 필요에 의해서 사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쓸모가 없는데도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할 연필과 각종 펜들, 샤프펜슬, 홀더펜, 만년필과 각종 볼펜, 붓펜, 각종 리필심들과 딸려서 사야 하는 것들, 예를 들어 연필깎이와 필통, 잉크등등... 심지어는 그냥 예쁘다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데 사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는 물건들의 역사에 관한 책이 없었죠. 굳이 알려고 해도 웹검색을 하는 수 밖에 없는데... 외국엔 이런 정보들이 좀 있긴 하지만, 한국웹에는 문구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떠도는 소문인데, 대부분 잘못되었거나 혹은 제조사가 꾸며낸 이야기가 많았죠. 이 책에서도 제조사가 꾸며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으로 몰스킨과 블랙윙이 그렇죠.

사실 덕후라는 용어는 지금은 조금 더 편안한 표현이 되었고 긍정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조롱의 의미였고 지금도 사실 조금은 조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사람들은 덕후임을 스스로 자체하기도 하죠. 문구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면, 뭘 그렇게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냐고 하는 사람이 지금도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블로그에 글을 쓸때도 왜 그런 사소한 주제로 글을 쓰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거든요. 그럼 사소하지 않은 주제는 뭘까요? 요즘엔 사소한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어버린것 같아서 이런 물음에 해답이 있을까 모르겠네요? 그럼 정치적인 이야기(물론 정치는 중요합니다.) 혹은 사회, 경제, 그것도 아니면 연예인 가십이라도 다뤄야 할까요? 꼭 문구가 아니더라도 그게 맛집이든 차나 커피든, 혹은 화장품이든 혹은 뭐든 그게 사소한가 아닌가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에 얼마나 내가 흥미를 느끼고 즐거워 하는게 중요하고 그걸 더 중요하게 다루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이제 낯설거나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이것은 우리가 쓰는 문구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역사 조차도 요즘은 전쟁광이나 왕이나 정치인들, 혹은 잘난 사람들의 역사를 여태 배웠다면, 최근엔 점점 더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를 배우고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고 있습니다. 비록... 2015년도 이제 두달 밖에 안남았는데... 우리는 국정교과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한심한 상황이지만, 사실 저는 검정도 그게 제대로 된 역사교과서인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인간의 역사도 지금은 평범한 것이 더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의 역사도 흥미롭게 읽고 의복이라던가 부엌의 역사라던가... 이런것을 흥미롭게 읽기 시작했죠. 사실 아직은 이런 책들이 많이 나온건 아닙니다. 예상하건데... 앞으로는 더 많은 책들이 나올꺼라 생각합니다. 여태 우리가 흥미를 느꼈던 역사나 이야기는 이제 지루해졌거든요.

이 책을 읽으면서도 어떤 기업이 어떤 문구를 개발했다, 이런것보다 더 사소한 것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볼펜을 가져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은행이나 관공서 이야기라던가, 수천가지 용도에 대해서 집요하게 제조사에 문의를 해서 답변을 받아낸 이야기라던가.. 이런 이야기가 좀 더 흥미롭더군요. 또 필자도 지적했듯이 요즘엔 대기업(혹은 글로벌 기업)이 점점 작은 기업을 인수해서 덩치가 켜지는 세태가 참 씁쓸하기도 합니다.

책은 어쩌면 문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흥미롭지 않을 겁니다. 또 기업을 다루는 책들이 대부분 부풀려진 성공 신화를 떠벌리면서 기업가나 기업을 홍보하는 수단이 되거나 혹은 유치한 자기계발서 분위기라면 이 책은 적어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라서, 아마도 그런 책을 원하는 분에게만 맞지 않을것 같네요. 물론 이 책에서도 혁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긴 합니다. 어쨌든 문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아주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겁니다. 저도 최근에 독서모임 책을 제외하고 가장 빨리 읽은 책이거든요. 아쉬운 점이라면... 이 책에서 다루는 문구가 대부분 유럽과 미국의 문구들이라는 점이죠. 일본의 문구도 좀 나오긴 합니다. 물론 우리의 문구는 좀 빈약해서 세계에 이름을 떨친적이 없고... 사실 우리 문구를 사랑하자. 이런 유치한 말은 아니구요. 아무래도 어린 시절 쉽게 접했던 것은 국산 문구니깐요. 그런 이야기는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니깐요.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우리 문구 전문가?가 혹시 있다고 해도 책 한권을 이렇게 전문적인? 내용으로 꽉 채울 수 있는 우리의 문구역사가 있는가? 이런 문제가 있긴 합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도판이 부족했다는 점.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구글링을 해서 문구 이미지를 찾아보곤 했습니다. 일러스트 몇점이 실려 있는데... 아무래도 글로 설명하는것 보다 사진이나 그림으로 된 도판을 더 많이 실어줬다면 좋았을꺼라 생각되네요.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1. 3. 16:05

 

 

* 안녕하세요. 아르하입니다. 워낙 서평 게시판이 썰렁해서 예전에 써둔 서평 몇개를 올립니다.^^ 이방인은 독서모임에서도 다뤘으니깐요.

이방인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다 읽고 나서 적잖은 충격을 받고 그 뒤로 카뮈의 모든 소설을 탐독……. 이렇게 나갈 줄 알았죠?ㅋㅋㅋㅋ 아.. 죄송합니다. 서평에 이런 장난질을…. 모처럼 진지하게 나갔는데….

사실 저는 그런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어릴 때 포우의 <검은 고양이>를 읽고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건 문학적인 어떤 충격이라기보단 일인칭 시점으로 쓴 그 단편이 몽땅 사실로 알고, 순진하게 말에요. 어쨌든 그 모든 걸 사실로 받아들이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공포감이 생겨서 충격을 받았던 거죠. <어셔 가의 몰락>같은 작품에선 정말 무서웠죠게다가 <아몬티야도 술통>에선 어찌나 적의로 똘똘 뭉쳐졌는지 놀라고 신기하기까지 했죠. 도대체 이름난 문학작품이란 게 이렇게 증오와 적의로 뭉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아 그래서 이방인은요? 중학교 1학년코 찔찔 흘리고 다닐 때 읽긴 읽었습니다. 방학 때 집에서 따분하게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오후 방바닥에 포켓북 형태의 세계문학 전집이 몇 권 있거든요. 아마도 누나가 산 것인지 빌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톨스토이 장편 한 권이 있었는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맥베스> 합본이 있었고요. 그리고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엔 <이방인>말고 뒤에 뭔가 다른 작품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톨스토이는 읽자마자 졸음이 쏟아져서 관뒀습니다. 뒤에 <햄릿>은 읽고 <맥베스>초반만 읽었죠. 그리고 <이방인>은 다 읽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기억은 납니다. 첫 장부터 어머니가 죽어 장식에 가는 장면이 기억나고 살인을 하고 감옥에서 사제에게 분노하며 뭐라 뭐라 장황하게 떠들었던 기억이 납니다아마도 그땐 어렸기 때문에 도무지 이 소설을 이해하기 어려웠죠. 저는 그때 큰누나가 선물로 사준 <꼬마 니꼴라>를 정말 재미나게 읽고 있었거든요.

 

뭐 어쨌든 코 찔찔 중학생이 읽기에는 퍽이나 어려운 소설이겠죠. 그나마 짧아서 다 읽었던 것 같은데, 읽고 나서 제가 기억하는 건 작가가 종교를 무척 싫어하는구나. 그리고 주인공이 정말 짜증 나는 놈이란 점과. 또 그리고 이 책은 주말마다 교회 가는 친구들이 읽으면 좋아하지 않겠구나. 정도였죠. 그리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지금은 또 전혀 다르게 느껴지네요.

 

저는 처음에 주인공을 오해했던 게그 옛날 읽고 느낀 것처럼 주인공의 성격에 짜증이 나긴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유부단하게 보였거든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마지못해 대답하고 이렇다저렇다 줏대가 없어 보였는데 사실 지금 다시 보니, 특히나 2부에서 그가 재판을 받는 과정을 보고 있으니 그는 우유부단한 것이 아니라 단 한마디도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독특한 인간이더군요. 예를 들어 여자친구 마리가 결혼하자고 하자 사랑하지 않지만 결혼하기를 원한다면 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대답이 참 많은데…. 심지어 자신을 사형에 처해줄 것을 요구하는 검사의 말조차도 어느 부분에서 맞는 말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네요.

 

저는 이 사람이 무신경하며, 우유부단하고 뭐든지 귀찮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거죠. 그는 보통 사람보다 더 섬세하며(어떤 면에서는요) 우유부단하지 않으며 단지 거짓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마치 코미디 영화에서 아들의 소원으로 거짓말 자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처럼요작가는 주인공 소는 죽는 한이 있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거부 그 자체이며, 그 거짓말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에 적응해나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말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각주:1]

설명이 필요없는 대목이죠. 우리는 숱한 거짓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앞서 사랑하지 않지만 결혼할 수는 있다고 말한 뫼르소의 말을 떠올려보세요. 우리는 그 말이 괴상하게 들리죠. 왜냐하면, 사랑하지 않지만, 결혼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가 아닙니다. 왜 마리와 있으면 즐겁고 성욕을 느끼고 결혼을 해도 괜찮다 싶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까? 그냥 사랑해라고 말하고, 그게 거짓말이라고 해도 혹은 앞으로 사랑하면 되니깐 그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말을 수도 없이 합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이 사회에 적응해나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것은 결코 잘못도 아니며 범죄가 아닙니다. 그냥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그건 그냥 오랜만에 만난 학교 동창에게 반갑다고 악수를 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반갑지 않아도 그렇게 하는 거죠. 예전에 저는 주인공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했던 것이 아니라 사건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 같네요.

 

또 뫼르소가 정말 살인을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더군요. 사실 정말 살인을 하긴 했지요. 뫼르소는 태양 때문이라고 말해서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지만요. 사실 왜 그를 죽였는지 저도 잘 모르겠더군요. 근데 그게 중요할까요? 재판 과정을 쭉 지켜보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뫼르소가 아랍인 남자를 총으로 쏴 죽였는가? 그렇다면 그게 계획된 일인가 우연한 일인가? 이런 의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뫼르소가 어머니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는가? 마지막까지 어머니의 시신을 왜 보려 하지 않았는가? 불량한 친구는 왜 사귀었는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 왜 마리와 수영을 하고 영화를 보고, 그것도 하필 왜 저속한 희극 영화였던가! 그리고 그날 밤 마리와 잤는가? 그런 게 갑자기 더 중요해졌죠. 재판에서 검사는 뫼르소가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매장했으므로 유죄라 주장합니다.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 달 여자를 만나 수영을 하고 희극영화를 보며 시시덕거리며 그런 엄숙한 날 섹스를 하는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그의 다른 범죄에 대해서도 더는 논의할 가치가 없더란 식으로 얘기하죠. 그러니깐 보편적인 사회 규범을 지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검사는 더 노골적으로 얘기합니다. 평소에 그가 그런 사회 규범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법정에 세울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그러나 그는 살인했으므로 그 살인 이후에는 그가 지난날 했던 모든 일은 다르게 해석이 되는 것이죠.

작가는 이런 재판의 세계란 부르주아이기도 하고 나치이기도 하고 공산주의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각주:2] 이 말에 공감을 하든 안 하든, 저는 재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재판을 지켜보면 늘 그 당시의 정황이 물적 증거가 범죄를 말해주는 것만큼 그 사람의 과거 행적, 주변 사람과의 관계들이 모조리 까발려지고 그것이 마지막 선고의 어떤 영향을 주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좀 지나친 작가의 해석이 아닐까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한편으로 그 시대에 살았던 작가라면 말입니다. 적어도 제국주의의 도래를 보고 또 천박한 자본주의가 생긴것을 보았고 또 나치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행했던 그런 구역질 나는 짓거리를 보았고 전체주의 탈을 쓴 공산주의가 어떤 생겨났는지 지켜보았더라면…. 어쩌면 뫼르쇠같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생기지 않았을까? 결말에 가서 그는 사형수로 인식되진 않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말에 종교인들이 항의할 수도 있겠는데…. (예수가 한 남자를 총으로 쏴죽인 게 아니니깐요.) 이 부분은 좀 이해해주셨으면 하네요. 저는 종교인이 아니라 온전히 종교인의 입장으로 이 부분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느낀 건 예수는 자신이 죽음을 당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심지어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하죠그런 징후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으며 자신에 닥쳐올 죽음을 피하지 않겠다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는 죽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죠. 부활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가 죽음을 선택한 행위입니다. 물론 예수는 인간이 인간을 뛰어넘은 것이며 뫼르소는 그냥 한 인간일 뿐이죠.

 

이방인의 마지막 단락을 읽으면서 뫼르소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가장 삶으로 충만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다는 것을 그가 이해했다는 부분에서 잘 나타납니다이건 굉장히 역설적인데말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글쎄요. 저도 서평을 쓰려고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뭔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맴도는 어떤 것이 있는데 끄집어 얘기하기란 쉽지 않다는 거죠.

모르겠습니다. 저는 책 뒤에 엄청 길게 쓴 해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건 말 그대로 그 해설을 쓴 사람의 이해이고 생각일 뿐이지 제가 그걸 읽는다고 이해에 도움은 되겠지만, 저의 생각이 되는 건 아니니깐요. 이방인은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 같아요. 사제가 말했던 우리는 모두 사형 날을 받아 둔 사형수이고 뫼르소는 세상의 모든 거짓말에 대한 혐오의 상징이며 또 마지막 결말에선 역설적이게도 그래도 우리가 삶을 계속 살아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죽고 사회 속에 속하고 부조리 안에 사는 것 자체를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한마디로 그것은 인간의 삶 자체죠.

 

결론은 조지 오웰의 소설을 읽을 때,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좀 읽고 또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많아질수록 그의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소설 <이방인>을 더 잘 이해하려면 작가와 그 작가의 시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카뮈의 소설을 더 읽어볼 것, 그가 쓴 에세이든, 서신이든, 그 어떤 글이든 좀 읽어 볼 것.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다양한 이야기를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다양한 이야기는 계속 읽고 있죠. 거기에 카뮈의 다른 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1. 출처 독일 독자가 알베르 카뮈에게 <이방인>을 각색해 보겠다는 제한에 대한 작가의 서신, 이방인(민음사), 부록-이방인에 대한 편지 [본문으로]
  2. 출처 독일 독자가 알베르 카뮈에게 <이방인>을 각색해 보겠다는 제한에 대한 작가의 서신, 이방인(민음사), 부록-이방인에 대한 편지 [본문으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1. 3. 14:31

 


쑥스러운 고백

저자
박완서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5-01-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그리운 이름, 박완서 살아 있는 목소리로 다시 만나다!한국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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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에 발표한 박완서작가의 첫 산문집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를 재편집한 책이다. 작가가 떠난지 4주기를 맞아 7권의 산문 전집이 나왔다. 표지는 작가의 유품을 찍은 사진으로 디자인한것이라고 하니, 작가를 아끼는 분들에게 남다르게 느껴질것 같다. 책 자체도 예쁘게 잘 나왔다. 판형도 아담해서 한손에 쏙 들어오고 본문 편집도 예쁘다. 튼튼한 양장에 제본도 아주 잘되어서 신경을 많이 썼구나 싶다.
표제작은 왜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쑥스러운 고백>으로 바꿨는지, 책을 다 읽고 나니 알것 같다. 분명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는 아주 강렬한 산문이여서 표제작으로 충분히 손색이 없지만, 지금은 이 책이 발표된지 40년이 다 되어 가기 때문에, 이 산문집 전체의 느낌을 대표할 수 있는 표제작으로 아마도 <쑥스러운 고백>이 잘 맞지 않았을까? 당시 작가는 데뷰한지 7년밖에 안되었고 많은 글에서 자기 고백과 성찰이 엿보인다. 작가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또 한 여자로서 그 시대, 1970년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는데,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지금와 읽어보면 무척이나 새롭게 느껴졌다. 지난 몇년전부터 갑자기 복고 바람이 불었는데, 드라마라던가 영화에서 그런 복고 코드가 유행인듯 하다. 거기에 사회도 약간 꺼꾸러 흘러가는 기분이라 그런지 더욱더 복고가 유행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그걸 추억거리로 치부하는 것까지는 상관이 없겠지만, 그것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좀 우숩다. 물론 과거의 역사를 우숩게 보는게 아니다. 그저 그 옛날이 좋았지, 라던가 혹은 그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게 웃길 뿐이다. 과거로 돌아가는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만큼 억지스러운게 또 있을까. 그저 우리는 과거를 쳐다볼 뿐이다. 이 산문집은 70년대 이야기로 가득차있다. 내가 태어나기전에 일들이기 때문에, 대부분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분들도 해당될꺼라 생각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왠지 친숙하기도 또 낯설기도하다. 친숙한것은 앞서 말한 드라마와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친숙하기 때문이다. 마치 공연을 하기 위해 만든 무대장치처럼, 70년대나 80년대의 이미지가 있다면, 작가가 실제로 느끼고 기술한 산문은 그 이미지와는 또 달라서 낯설게 느껴진다. 첫 산문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 등장하는 버스안내양을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블로그에 주로 들어오는 연령이 20대, 30대, 10대 순으로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아마도 영화속이나 드라마에서나 봤을 것이다. 나도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 버스안내양에 대한 기억이 있긴 한데, 그것조차도 기억이 또렷해지는 나이가 됐을때는 이미 다 사라졌다. 친숙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낯설었고, 또 낯설다고 했지만, 왠지 상당수 많은 부분은 또 요즘의 우리 사회를 연상케 하는 부분도 있다. 200년쯤 전에 쓴 <목민심서>에서도 다산은 머릿말에서, 당시 조선이 성인의 시대와 그 거리가 멀어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거둬들이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 모른다고 한탄한다. 책 전체에서 우리 사회, 그것도 군주제가 아닌 민주주의 사회에서 흔한 타락과 부폐와 쏙 빼닮은 부정들을 지적한다. 그러니 나라의 거대 여당의 수장이 왜 기업이 부정하고 정치인과 공직자가 부패한가?라는 질문의 해답으로 국민 복지의 과잉을 그 이유로 내세우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백성을 기른다, 즉 백성을 양육하는, 지금에 와서는 국민을 섬기고 잘 보살펴야할 의무를 지는 자의 몰상식함은 왜 예전이나 지금이 똑같을까? 어쩌면 조금씩 변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느끼기엔 너무 더딘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박완서작가의 글을 읽을 때, 가장 좋은 부분은 작가와 세대차이가 많이 남에도 불구하고, 또 이처럼 우리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있다. 첫 산문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우리는 마라톤 하위 그룹에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는 작가를 발견한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나는 스포츠 경기에 늘 시들하다. 챙겨 보지도 않고 열열하게 응원하는 팀도 없다. 그러나 가끔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가족이나 식구와 함께 티비를 보다가 열열히 응원하고 박수를 칠때가 있다. 그 경기가 꼭 결승전은 아닐때도 많다. 게다가 그것은 집단애국의 발로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다. 순위에 상관없이 노력했던 한 인간에게 보내는 갈채이기도 하지만, 어쩌다 한번 열광을 하고 싶을 때, 불완전한 동질감을 느끼고 싶을 때, 그저 한바탕 박수를 쳐서 응원을 하고 싶을 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것 뿐이다. 작가의 글을 조근조근 읽다보면 이런 뜻밖의 공감을 발견할 때가 자주 있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작가의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즐거움이 아닐까?
우리는 70년대를 살아내지 않았고 (물론 70년대를 살아낸 분들도 이 글을 볼것이다.) 그 안에서 작가가 느꼈을 것들을 이렇게 좋은 문장과 좋은 편집으로 만나 볼 수 있다. 그 시대 작가가 느낀 시대상, 각종 사건들, 여성운동에 대하여, 교육열에 대하여, 도시의 주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늦깍기 작가의 첫번째 산문집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나는 이 서평을 쓰기전에, 어떻게 쓸까 궁리를 했는데, 작가의 좋은 문장들, 또 인상 깊은 구절을 몇개 넣어서 써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런게 너무 많다. 어떤걸 골라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렇다고 그 문장만 쏙 빼서, 혹은 한 단락만 쏙 빼서 넣는것도 전체의 느낌을 다 전달하기 어려울것 같았다.
표제작 <쑥스러운 고백>에서 작가는 여공(女工)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총력을 다해 추구하고 있는 번영이 결코 어느 특정인을 위한 거나 또는 외국 관광객을 위한 전시용이 아닌, 우리 모두가 잘살기 위한 진정한 의미의 번영일진데 여러분이 여러분의 근로에 충분한 보답을 받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으리라는 걸 믿으며 거의 기도하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렇게 돼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돼어가는 과정이라면 과정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치르지 않는 부정이 너무 많다. 그것은 명백한 기업주의 부정인데도 앞서 말했듯이 집권당의 대표는 그 기업주를 비난하거나 그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뿐더라 그것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있다고도 하고 또 복지의 과잉이라고도 하는 괴변을 늘어놓았다. 한때 근면한 노동은 좋은 선전거리였다. 그것은 아직도 이용되고 있다. 때론 상업적인 추억팔이로 이용되며 또 한편으론 무언가를 억압하려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과거의 부모세대의 노력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노력이 온전히 그들에게 돌아갔는가를 반문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온전히 쓰였다면,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 더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박완서작가의 글에서 시대를 초월한 공감이 앞서 좋기 때문에 작가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또 하나 추가하자면 작가가 왜 글을 쓰는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확고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산문 <나는 왜 소설가인가>의 한구절에 그 부분이 명확하게 들어나 있다. 이 또한 내가 작가를 사랑하는 두번째 이유기도 하다.

"내가 인간이기에 인간 같지 않은 인간과 그런 인간을 만들어낸 시대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구를, 그 후에 쓴 소설을 통해서도 내가 살아온 분단 시대. 산업화, 정보화 시대가 어떻게 인간성을 속물화, 황폐화시켜가는가를 증언하는 걸로 일관되게 유지돼왔다. 또한 이 나이까지 꾸준히 소설을 써온 건, 이야기가 지닌 살아낼 수 있는 힘과 위안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22. 13:35

2015년 2월, 독서모임 다독다담을 통해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게 되었다.(아마도 혼자였다면 읽지 못했을 책이기 때문에 같이 읽어 준 다독다담 회원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처음 산 것은 2014년이었다. 거의 1년 정도 전. 새벽감성에 젖어 의미 없이 인터넷 웹페이지를 뒤적거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멍하니 모니터를 훑고 있던 나의 정신을 확 붙들어 당기던 한 구절이 있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 구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그 구절에 시선을 빼앗겨 한참을 쳐다보았고, 찌르르 울리는 가슴과 함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구절이 목민심서에 담겨 있는 글이라는 글쓴이의 소개말을 보고 '아! 이런 구절이 담겨 있는 책이라면 반드시 사서 읽어 봐야겠다'라는 마음에 바로 인터넷 서점에 접속하여 주문을 넣었다.

그렇게 책이 왔고, 결과는 보시다시피 근 1년이 지나서야 이렇게 독서모임을 통해 읽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랄까? 그때 그렇게 나를 끌어당겼던 그 구절은 1년이 지난 지금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난 후에도 그게 어떤 구절이었는지 찾지 못했다. 하하...;;

아무튼.

나는 전문적으로 책 리뷰를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게 어떤 책인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구구절절 자세한 설명은 접어 두고, 그냥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만 간단하게(?) 적고 넘어가고자 한다.(그래도 아주아주 간단하게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소개하자면 마을 수령이 되었을 때 행동은 어떻게 하고 마을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한 초보 수령 지침서이다.)

 

책에서 다산은 이렇게 얘기한다.

[사대부의 벼슬살이하는 법은 언제라도 벼슬을 버린다는 의미로 '버릴 기(棄)' 한 자를 벽에 써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눈여겨보아야 한다. 행동에 장애가 있거나,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거나, 상관이 무례하거나, 내 뜻이 행해지지 않으면 벼슬을 버려야 한다. 감사가 내가 언제든지 벼슬을 가볍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며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난 후에라야 비로소 수령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를 잃을까 저어하여 황송하고 두려워하는 말씨와 표정이 드러나면, 상관이 나를 업신여겨 계속 독촉만 하게 될 것이니 오히려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필연의 이치이다. 그러나 상관과 하관의 열이 본래 엄한 것이니, 비록 사의를 표명하여 관인을 던지고 결연히 돌아가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말씨와 태도는 마땅히 온순하고 겸손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울분을 터뜨리지 않아야 비로소 예에 맞다고 할 수 있다.] 정선 목민심서 97.p

나 자신의 문제이든 외부에 의한 문제이든 정상적으로 수령의 업무를 볼 수 없다면 그 자리를 버려야 한다.

동시에 그 자리를 버리고 나올 때의 모습에 예를 잃지 말아야 한다.(책을 보면 알겠지만 다산은 항상 예를 강조한다.)

 

현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는 참으로 무겁게 다가오는 메시지이다.

당장 나부터도 자리를 버리고 나온다는 건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다산의 말이 백 번 옳다는 걸 안다. 언제라도 자리를 버릴 수 있어야만 제대로 업무를 볼 수가 있다. 그러지 않고 자리에 연연하고 본인의 안위에만 신경을 쓴다면 어찌 제대로 업무를 볼 수 있으며, 특히 공직이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비리와 부패를 피해갈 수 있을까.

비리와 부패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들려오는 이 시대, 다산이 말하는 것과 하늘 끝 반대의 위치에 있는 안정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고민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는 메시지이다.

무엇이 정답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이상을 좇기엔 지금의 자본 중심 사회의 현실이 구조적으로 비틀어져 있기 때문이다. 도둑질이 나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직업과 돈이 없어 갓난아이 먹일 분유를 훔치는 어미를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산이 말한 언제라도 자리를 버릴 수 있음과 현시대의 자본중심 사회구조, 안정추구, 부패, 비리 등의 문제는 무엇이 옳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하기엔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사회적 변화가 필요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답은 못 내리더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볼 만한 문제가 아닐까 한다.

특히나 나에게 무겁게 다가왔던 다산 정약용의 메시지.

여기서 마치겠다.

 

 

 

 

p.s.

끝이 조금 그렇지만, 나는 밝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정선 목민심서

저자
정약용 지음
출판사
창비(창작과비평사) 펴냄 | 2005-03-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
가격비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18. 20:48

 

책모임 최고의 책은…
역시 아무래도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아닐까요?
펼치기 전의 그 두근거림을 당할만한 책이 있겠어요?

2년간 해온 책모임을 결산하면서 짧은 단상을 펼쳐 봅니다

열하일기, 박지원
저는 청소년용 그림이 그려진 열하일기를 십대 적 한 권짜리로 읽었더랬어요. 이 책은 이번에 새로 나온 완역판이었는데 옛날의 그것과 꽤 달랐어요. 그런데 아주 좋았어요. 중간 중간 다른 분들이 파고드는 부분도 좋았고요. 책을 여럿이 같이 읽는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어요. 내겐 아주 당연한 것이 어떤 분에겐 전혀 생소하다는 것도 놀라웠구요, 다른 분이 잘 알고 있는 것을 제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도 있어서 좋았어요. 이걸 보니까 두만강에 가보고 싶어졌고, 중국의 자금성이 보고 싶어졌어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가 보고 싶더라구요.
아참, 박지원씨는 정말 글을 잘 씁니다.

고양이의 지구의, 아키야마 미즈히토
다른 분들이 진짜 괴로워했던 라이트노벨이에요. 하드SF라고 분류하기는 애매하고 가벼운 SF쪽으로 분류할 수 있겠네요. 저는 꽤 좋았어요. 고양이 형태의 유사인간-사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갖고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지만 고양이의 성질을 부여해놔서 이 작가가 진짜 고양이를 좋아하든지 고양이에 관심이 많든가 하구나 싶었어요. 전 고양이에 아무 관심이 없어서 고양이를 좋아하는 다른 두 분이 보면 좋아하겠다 싶었는데 전혀 아니더라구요-과 지구 그리고 달과 유사한 생태계에서 이루어지지 못할 꿈을 좇는 모험자의 이야기에요.
사실 작가해설을 보고서야 컨셉을 이해하기 쉽다고 하면 이미 그 작품은 작품 자체로선 좀 망한거죠. 격투기 선수가 신처럼 대우받아요. 뛰어난 격투기 선수가 대결에서 우승하고 추장 같은 권력을 얻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격투기 선수가 여기 있어요. 그런데 이놈이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검은 새끼고양이 같은 놈에게 져 버렸어요. 그런데 그 검은 새끼고양이 놈은 자신과의 결투엔 흥미가 없어요. 대신 뭐 달나라에 가겠다느니 로켓이 어쩌구 하고 헛소릴 해요. 그래서 이 최고의 실력을 가진 격투기 선수 군은 야이 이놈아 난 가짜 추장이야 니가 진정한 추장이야 하고 버럭버럭 진정한 승부를 가리자고 팡팡 뛰죠. 그런데 저 새끼고양인 관심이 없어…

아 진짜 재밌다고요. 난 재밌게 읽었는데! 끝까지 읽으면 재밌어요! 진짜로.

번역이 좀 일본어투긴 했어요. 탁탁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에요. 그래도 꽤 좋답니다.

경도, 데이바 소벨
너무 어려웠어요.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제 과학 지식이 부족했어요.
다시 봐도 어려웠어요. 이건 정말 과학적 지식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읽을 수 있는 듯.
물리학 박사하는 언니가 쉽고 재밌다고 추천해 준 엘리건트 유니버스인가가
무시무시하게 어려웠던 기억이 났습니다.
책은 예뻤어요. 중간 중간 시계 이야기 같은 건 좋았어요.

화이트 타이거, 아라빈드 타이가
어느순간 이런 류의 인도 이야기들에 익숙해져버렸어요. 실제 인도에 다녀오신 람님 이야기와 함께 들으니 흥미로웠어요. 저로서는 이 이야기를 왜 추천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숙제책이 아니었다면 볼 일이 없었을 류의 책입니다. 좋은 점도 있었어요. 씁쓸한 점도 있었는데, 음, 저로서는 흥미 없는 분야의 그저 그런 책이었어요.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일곱 번쯤 다시 읽었는데 다시 읽을 때마다 찌릿해요. 무시무시한 책입니다. 이런 책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어요. 재미로 읽을 책은 아니지만 재미’도’ 있다는 게 대단합니다. 다시 읽어야겠어요.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정치적인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파악해야 하는데 그것까지 알아보고 싶지 않더라구요. 읽는 내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엄청나게 편식 읽기를 해왔다는 걸 알았어요. 조지 오웰의 다른 책들, 1984년이나 동물 농장은 재미있었으나 이 글은 매우 재미없었습니다. 전 동물 농장이 소설치곤 재미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글에 비하면 아주 양반이었어요.

7년의 밤, 정유정
지릿지릿하고 놀랍고 무서운 이야기였어요. 흡입되어 순식간에 읽어 버렸어요. 내 삶의 한 시간 반이 전혀 아깝지 않았어요. 우리나라 시골마을에서 정말 일어날 법한 일인데, 이런 류의 한국 소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어색하지 않았어요. 소름끼치고 공포스러웠어요. 실감나는 책이었습니다.

북학의, 박제가
이런 류의 책들을 매우 좋아해요. 제가 선정했지만 선정될 줄은 몰랐어요. 짙은 갈색 표지의 이 책이 제 책장에 꽂혀지려면 숙제책이었다 싶은 핑계가 필요했는데 잘 됐어요.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어요. 검은 대륙 같이 어떤 시점, 어느 장소 제가 전혀 모르는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줄줄 나열되어 있고,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에 대해 소소하게 늘어놓는 것들이 좋아요.


<갈매기>,<벚나무 동산> 안톤 체호프
희곡은 셰익스피어 말고는 처음 읽었어요. 아! 아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도 읽었네요. 어쨌든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대화가 줄줄줄 있는데 무대를 전혀 상상할 수 없었어요. 같이들 소리내어 읽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발제자가 나타나지 않는 책모임은 슬프죠.

대표 단편선집, 손창섭
이 사람 글 진짜 충격적이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죠?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덫으로 콱 잡아서 생생하게 포착했어요. 무슨 살아 날뛰는 쥐가 쥐덫에 갇혀 있는 거, 그걸 통째로 내 눈앞에 들이민 느낌이에요. 멋집니다. 이런 좋은 작가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류의 단편 매우 좋아합니다. 추천받습니다.

콘티키, 소르 헤이에르달
남자들이 배타고 멀리 가는 이야기. 지금 다시 봐도 두근거립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이라 막연하게 뗏목에 대한 친근감만 있어요.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종차별적’ 언어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거. 신기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서 다르게 읽어요. 그래도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미국민중사, 하워드 진
노예 해방 등에 대한 다른 시각을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런 시각은 처음 봤어요. 제가 정말로 모르는 게 많았구나 싶었습니다. 다만 원래의 미국 역사적 시각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냥 어어 팔랑팔랑 하면서 봤다는 게 아쉽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매우 추천받아서 억지로 읽은 책이었는데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철학책은 꼭꼭 씹어먹어야 하는데 너무 후루룩 읽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저 이 모임 안 나갔죠.. 죄송합니다. 내년엔 개근을…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코니 윌리스
저는 사실 이 책보다 이 작가는 <둠즈데이 북>을 더 추천하고 싶습니다. 진짜 좋아요. 오디오북도 괜찮고요. 물론 이 책도 아주, 아주, 좋습니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진 리스
이건 정말로 제가 읽을 일이 없던 책이었는데요. 저도 누군가 읽는 것을 보고 읽게 된 책입니다. 아름다운 섬에 있는 하얀 저택에서 빛바랜 드레스를 입은 아리따운 백인 아가씨가 흑인 유모의 시중을 받으며 꿈꾸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곧 화재로 끝나버리고요. 결말도 슬펐습니다. 제인 에어 자체는 제가 그리 좋아하는 책이 아닙니다. 제인 에어는 그 남자를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리고, 그 미친 여자에게도 삶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진 리스씨의 결단도 좋습니다. 이런 거 좋아요. 아참, 제인 에어가 좋다면 제인 에어 납치사건도 읽어보세요. 그건 이 작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인 에어를 썰고 자르고 참견합니다. 괜찮아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스마트폰과 컴퓨터와 휴대용 음악기기등에 둘러싸여있는 자신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좋았습니다. 한 편 한 편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생각을 해야 했거든요. 나는 이랬구나. 당신은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 하고. 이 사람의 사고는 정말로 대단합니다. 좋았어요.

엘저넌에게 꽃을(구:빵가게 찰리의 행복 어쩌구), 대니얼 키스
엘리자베스 문의 <어둠의 속도>와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맞아요. 정말 다른 형태의 패러랠 월드란 느낌입니다. 아참, 테드 창의 단편선중에 있는 작품이 있는데 뇌의 급작스러운 발전에 대한 내용이거든요. 그거도 좋아요.

저는 가끔 이 책으로 돌아옵니다. 일년에 두 번 정도는 다시 읽는 듯 해요.

어렸을 땐 아마 이걸 읽으면서 난 더 나아져야 해, 더 배워야 해, 찰리를 위해서라도 그래야 해, 하고 생각했던 듯 싶어요.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책 속으로 한 걸음 성큼 걸어들어가서, 찰리와 함께 철자를 익히고 사랑을 시작하고 실망하고 상처받고 그리고 끝내고 돌아옵니다.
바보처럼 사는 게 무어 그리 나쁜가요.

조선언문실록, 정주리&시정곤
아 전 정말 이 책이 선정되지 않기를 바랬건만 여러분들이 골라버리셨습니다. 다음엔 내가 선정되지 않길 바랬던 책-_-;은 절대 목록에 올려놓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양반 얘기 조금 나오고 뭔가, 이야기가 없어요. 책에. 음. 전 이야기가 좋아요.
제가 그때 추천했던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이게 진짜 괜찮다니까요. 이거 좀 읽자구요. 으으.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요.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뭐라고 해야하지,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1권 같아요.
막 엉뚱한 일이 점점 더 커지면서 점점 더 우스운 거요. 중간 중간 심각하기도 한데, 기본적으로는 재미있고 유쾌한 거. 사실은 엄청 현실적인 일인데 개그스럽게 얘기하는 거에요. 어린 흑인 여자아이가 너랑 자보겠다고 하는 백인 남자에게 다리에 가위를 꽂아줄까 하는 따위를 농담을 섞어 쓰다니 대단해요. 그리고 실제로 웃겨요.
스웨덴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스웨덴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내용이 꽤 있어요. 스웨덴인이 아니라도 대체적으로 재미있긴 해요. 뭔가 이너 서클만의 이야기를 바깥에서 슬쩍 엿본 느낌이었어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켄 키지
저는 이게 제가 잘 아는 분야에 대한 책이어서 읽으면서 끔찍했어요. 두렵기도 하고. 음, 엄청 잘 썼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리고 그분이 실패했단 생각을 했어요. 규칙을 이용한 탈출까진 좋았는데, 나중에 제대로 머릴 못 굴렸군 싶더라구요. 결말이 제 맘에 들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모든 책들의 결말이 제 맘에 들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안 그래요?

나는 말랄라, 말랄라 유사프자이
이 책을 읽는 것보다 말랄라의 인터뷰 같은 걸 유투브 같은 데서 찾아서 보는 편이 훨씬 낫겠어요. 뭘 말하고 싶은 책인지 영 모르겠네요. 파키스탄 소녀가 고향 이야길 하는 부분은 처음 조금이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열심히 설득하려는 것 같았어요. 말은 맞아요. 좋은 말이에요. 소녀들도 공부를 할 수 있어야죠. 그런데 그녀가 지금 영국에 있어서 설득력이 떨어져요. 아니 그리고 넌 왜 기증받은 돈으로 가구를 사고 아버지가 땅을 사고 한 건지? 그런 얘기가 책 중간에 있어서 어이가 없었어요. 학교 세우라고 기증한 돈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너무 솔직하게 써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어요.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
어렸을 적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지금 와서 다시 읽으니 조금 다르긴 했어요. 그래도 그 놀라움과 경이감은 여전했어요. 이 책을 읽는다기보다 초등학교 6학년인 나를 다시 읽는 기분이었어요. 이 사람이 마구 비판하는 다른 사람들 책도 읽어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확실히 채식주의자에 대해서 소수니까 언급할 필요없어 하는 걸 난 채식주의자가 아니니까 어엉 하고 넘어갔는데 다른 분 말씀을 들어보니 이 사람 의견이 굉장히 독선적인 데가 있구나 싶더라고요. 같이 읽기가 이래서 좋아요. 그렇죠?

이건 정식 책은 아니지만.

바람의 화원, 이정명
과연 드라마감이더군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읽고 우리가 이야기할 내용이 뭐가 있을까 싶어서 일단 숙제책 추천은 안 했어요. 으잉 이 연애 라인은 뭐지 싶었는데 결론이 그런 거였어요. 아하하.

by 하나씨 2015. 2. 11. 16:14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저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출판사
민음사 | 1998-09-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이 작품은 작가가 직접 경험했던 노동수용소 생활의 하루 일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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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름이 참 어렵다. 러시아 관련 책을 읽다보면 이름이 긴데. 또 짧게 줄여서 쓰기 때문에 더 헷갈린다. 그 두개를 막 혼용을 해서, 체호프 희곡을 읽을때도 어려움이 많았다.

요 책은 독서 계획에 없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반짝 나타나서 밤새 읽었다. 지금 읽고 있는 <속삭이는 사회>에서 언급이 되어 꼭 읽어봐야 계속 진행 할수 있을것 같아서 잠시 독서를 중단하고 이 책을 읽었다. 속삭이는 사회는 스탈린시대의 사람들 이야기인데, 그 시대 사람들, 특히나 공산당원들은 말 한마디 잘못해서, 심지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강제 노동소로 유형지로 오년씩 십년씩 이십년씩 유형당했는데... 사실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큰 틀은 이해하겠지만 세세한 이야기는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왜 십년 형기를 다 채우고 다시 십년을 받는지? 이해 할 수 없었을것이다. 실제로 <속삭이는 사회>에 등장하는 수만은 사람들은 십년을 형기를 채우고 다시 십년을 받기도 잠깐 풀려났다가 다시 잡혀가기도 총살을 당하기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스탈린의 정신나간 숙청에 시달리며 살았다. 유형지에서 혹은 수용소에서 편지가 왜 중요한지 소포가 왜 중요한지도 <속삭이는 사회>를 보다보면 더 많이 이해 할 수 있다. <속삭이는 사회>는 수용소 얘기는 많이 나오지 않지만 그 시대 남겨진 가족들, 다시 만난 가족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어떻게 죽어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라서 이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속삭이는 사회>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은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웃긴데, 굉장히 암울한 이야기인데 몇몇 부분은 웃겼고 책장을 술술 넘어갔다. 이런 적이 전에 또 있었는데,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도 그랬었죠. 두 책은 공통점이 정말 많다. 암울한 수용소 이야기를 정말 냉정한 시점으로 이야기 한다는 점이 닮았다. 두 작가 모두 수용소를 경험했지만 어쩜 그렇게 냉정하고 마치 남의 이야기를 무심하게 하듯이 책을 쓸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마 보통 사람들(나를 포함)이 그런 경험을 하고 책을 썼다면... 정말 감정에 치우쳐서 쓰지 않았을까? 읽는 입장에선 그런 책은 읽기 무척 어렵다. 너무 감정적이라서 너무 어둡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암울한 얘기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도대체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한 이야기를 어떻게 맘 편하게 읽을 수 있겠는가?

 

어떤 부분에선 웃겼다. 상황들이... 소설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들이라서 허구로 느껴지지 않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레비가 말한것처럼 수용소는 우리가 이해 못할 공간이다.(또 레비는 수용소를 증언을 해야 할 최선의 존재는 이미 다 죽었기에 우리는 수용소에 대해서 영영 이해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수용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완벽히 이해는 못해도 이런 좋은 책을 통해서 말이다.

 

길지 않은 이야기였다. 딱 수용소에서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안에는 참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여기서도 레비의 물음처럼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왜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일본의 제국주의자 같은 미치광이가 생겨나는 걸까? 물론 이런 의문은 책을 덮고 나서다. 일단 우리는 이반 데니소비치가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때까지의 이야기를 쫓아간다. 어느 부분에선 웃기기도 하다. 어느부분에선 나도 억압된 단체생활을 하며 느꼈던 공포감을 다시 상기시킨다. 어느 부분에선 이런 일이 가능한걸까? 의문이 생긴다. 한가지 분명한건 어느 시대에나 미치광이는 있으며 잘못된 제도도 있다는 것이다. 그건 없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걸 모를 때, 알면서도 침묵할 때... 이런 비극이 발생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게 따지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좀 암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한동안 러시아 소설과 책을 더 읽어볼 생각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6. 20:32

 

 


속삭이는 사회. 1

저자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출판사
교양인 | 2013-09-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조심하라, 이 책을 읽으면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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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사회. 2

저자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출판사
교양인 | 2013-09-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조심하라, 이 책을 읽으면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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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소련 적군이 독일의 심장부로 진군을 시작한다. 그때 프리모 레비는 성홍열에 걸려서 아우슈비츠의 대규모 이동에서 버려졌다. 이후에 극적으로 살아남아 소련군에 구출된다.(이 이야기는 <이것이 인간인가>를 참고) 재미있는것은 스탈린시대에 소련의 국민들이 가장 자유를 느낀시기가 바로 이 시기라는 점이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때, 스탈린의 정신나간 체포후 총살과 강제 수용소 유형이 가장 덜했던 시기이며 사람들이 가장 자유를 누렸던 한 시기이다. 전쟁이 그렇게 한것인데 참 웃기지 않는가?

 

과거로 가서 다시 재구성을 해보면 이렇다. 1917이후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한다. 차르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전시대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러시아사에서 차르시대에 대한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 최근에 1903년에 발표한 안톤 체호프의 <벚나무 동산>이라는 희곡을 보면, 이시대에 이미 귀족층이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신흥 귀족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희곡의 부유한 귀족의 몰락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런 현상은 동시대 유럽에서도 비슷했던것 같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후에 소련을 보자면... 그럭저럭 공산주의의 형식을 잘 갖추는 듯 하다. 예를 들어 당시 당 간부들은 검소하게 생활했고 부르주아의 핵심 단위로 보았던 가정, 혹은 가족을 중요시 하지 않았다. 공동주택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공산주의 이상도 제법 잘 지켜지는듯 보였다.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공산당이라는 유일한 정치 체계는 이해하지만 독재자의 등장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독재자가 왜 필요한것일까?

1928년 이후에 집단 농장화가 시작되면 여러 문제가 생겨났다. 여기서 스탈린의 광기가 출발한듯 하다. 당시 부유한 농민을 체포해서 강제 수용소나 극동의 건설현장으로 유형을 시켰는데.... 그 체포가 참 말그대로 개판이다. 마구잡이로 근거도 없는 경우도 있고 혹은 허위 밀고도 있다. 스탈린은 이후 점점 미치광이가 되었던것 같다. 이런 공포사회, 즉 속삭일 수 밖에 없었던 사회는 스페인 내전 전까지 계속된다. 스페인 내전에서 그 지겨운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에 신물을 느끼고 무능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련의 헛짓거리에 도망치듯 조지 오웰은 스페인을 빠져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그가 쓴 <1984>를 읽어보면 어쩜 그렇게 날카롭게 스탈린 시대의 소련을 잘 묘사했는지. 마치 조지 오웰이 소련에서 망명한 작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조지 오웰은 소련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파시즘, 전체주의 국가로 보았다. 나도 그렇게 보인다. 북한도 사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랑 동떨어진 전체주의 국가로 보인다. 전체주의 국가가 보이는 독재자의 지나친 권력도 똑같고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설정해놓고 그 외부의 적의 공포로 국민을 위협하고 가두고 죽이는 식이 똑같다. 히틀러도 그랬으니깐. 히틀러는 순수혈통을 내새우며 아닌 모든 인종을 위험한 적으로 삼았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더 했다. 그래서 마치 그냥 두면 자신들이 결국 숨막혀 죽을 것이라는 식으로 국민들을 선동했다. 스탈린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죽고 유형당하고 추방당했던것들은 이런 공포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런 점에서 본다면 조지 오웰은 <1984>를 통해 소련이라는 사회를 정확히 묘사한 것 같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의 승리였다. 소련은 사실 파시즘이 스페인을 잠식하든 말든 큰 관심은 없었던것 같다. 본토가 공격당한 그게 1941년, 정말 전쟁이 나기전까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웠다. 흔히 여기서는 인민의 적이란 이름을 사용했는데. 그 수많은 인민의 적중에 진짜 적은 얼마나 될까?

 

어쨌든 전쟁시기 스탈린 시대 사람들은 가장 많은 자유를 누렸다. 왜냐하면 당이 적이라고 규정한 것들은 실체가 없었으며 억압된 사회에서 감시와 고발로 서로를 믿지못했던 사람들이 전쟁이 터지자 실체의 적을 만났고 불신하던 이웃이 이제는 생사를 같이하는 동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유럽 전역을 진격하면서 외부의 세계에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눈으로 봤다. 프리모 레비의 <휴전>은 이 시기에 소련사람들의 모습을 잠깐 볼 수 있다. <휴전>을 읽다보면 소련의 적군들에게 꽤 호감을 느낀다. 독일군과는 다르게 모든 명령체계나 계획이 엉망이고 즉흥적이며 예측할 수 없지만 꽤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고 비인간적이지도 않았다. 이 사람들은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에 살아남은 사람들인데, 가족이나 친척의 일부는 수용소에 갇혀 있었고 억압된 사회에서 자신도 언제 체포될지 몰라서 밤마다 짐을 싸 놓은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역설적이게도 해방된 느낌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이런 분위기는 잠시 이어지지만 곧 스탈린의 숙청이 또 시작되었고 웃긴건 파시즘이 가져온 반유대주의도 흘러들어왔다. 2차 세계대전 속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그것은 갑자기 생긴게 아니라 이미 숨겨져 있다가 때를 맞춰 나타났던것 같다. 그것을 주로 다루진 않았지만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전쟁 당시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조금 참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이 1953년에 죽는데, 그 후에도 수용소는 계속 남는다. 수용소는 사실 소련 경제의 핵심이기도 했다. 값싸고 죽어도 상관없는 수많은 죄수들이 그 당시 공산주의의 실패한 소련의 경제를 떠 받치고 있었다. 수용소 이야기는 이 책에 거의 언급이 안되어 있다. 이 책은 수용소를 끌려간 사람들과 남겨진 가족들, 그들을 고발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1953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수용소에서 풀려난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후에도 계속 수용소에서 유형당했으며 스탈린의 행위가 고발된 20차 공산당대회 이후에 대규모로 풀려난다. 풀려난 사람들 중에 이미 삶이 망가져서 다시 수용소로 돌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솔제니친은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나 <수용소군도>같은 책에서 냉정하게 묘사한다.

스탈린 사후에 사람들은 여전히 스탈린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기도 하고 환의의 눈물을 흘렸지만 혹시나 체포될까봐 숨죽여 울기도 했다. 그리고 숙청을 행한 책임자의 일부는 참회했고 더 많은 일부는 부인하거나 과거를 날조했다. 이웃을 고발한 이들도 그 비슷했다. 

 

어머니와 어린 남동생 두 명과 함께 머나먼 시베리아의 알타이 지역으로 추방당했을 때 안토니나 골로비나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아버지는 러시아 북부의 고향마을에서 집단화가 추진 될 때 쿨라크, 즉 부유한 농민으로 체포되어 노동수용소 3년형을 선고받았고, 가족은 재산과 농기구, 가축을 집단농장에 빼앗겼다. 안토니나의 어머니에게 긴 여행에 필요한 옷가디를 챙기라고 고작 한 시간이 주어졌다. 그 뒤 골로빈 가족이 대대로 살아온 집은 파괴되었고 나머지 가족들도 뿔뿔히 흩어졌다.(중략)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올랜드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 1권, 머릿말 p.21

 

안토니나는 너무 겁이 나서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다. 한번은 선생님에게 벌을 받았는데 선생님은 반 친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너 같은 부류는 인민의 적, 비열한 쿨라크여서 추방당해 마땅해. 너네들 전부 바로 이 자리에서 박멸되면 좋겠다!"라고 고함을 쳤다. 안토니나는 부당함에 치를 떨었고 소리를 질러 항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훨씬 더 큰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고 말았다.

올랜드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 1권, 머릿말 p.23

 

온몸이 떨렸다. 나는 누군가가 자신은 쿨라크의 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 여자처럼 자부심을 느끼며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나로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생 동안 나는 클라크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노력해 왔다. 그 여자가 그 말을 햇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듣지 않았는지 주위를 살펴보았다.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누군가 들은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살폈는가? 두려울 것이 뭐가 있는가? 갑자기 나는 내 두려움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다음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쿨라크의 딸이에요." 나는 그때 처음으로 큰 소리로 그 말을 했다. 비록 머리속에서 천 번이나 속삭여왔지만 말이다. 주위에서는 내 말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황량한 도로에 혼자였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마침내 내가 말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강독으로 내려가서 강물에 몸을 씻었다. 그런 다음 우리 부모님을 위해 기도했다. (안토니나의 인터뷰중)

올랜드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 2권,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 p.532

 

이 책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일기와 편지, 각종 방대한 기록을 토대로 쓰여졌다. 또 인터뷰도 많다. 지난번에 <안나와디의 아이들>에서도 밝혔지만... 이런류의 책은 정말 대단하고 감사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조사와 수고를 한두권의 책으로 읽을 수 있다는게 한마디로 대단한 호사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 이 책의 기록은 유명인도 있지만 대다수가 일반 사람들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나 리얼리즘, 생생함... 그런게 남다르다. 이 책 뒤, 해설에는 조심하라 이 책을 읽으면 울지 않을 수 없다라고 써 있는데... 진짜 천페이지 넘게 읽으면서... 몇번이고 울컥했다. 스탈린 시대를 견뎌낸 사람들,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말 처절하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좋은 러시아 작가도 소개 받았다. 이 책에서 그 시대 소설가와 시인의 이야기도 한 테마였다. 그래서 고리키와 솔제니친, 불가코프의 책들도 읽었고 읽어볼 참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약간 씁쓸했던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던 스탈린을 아직도 그리워 하는 사람이 있다는게 놀라웠다. 하긴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현상은 종종 있고 심지어 우리시대에 우리 곁에도 있으니.... 뭐 놀랍긴 해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것은 공산주의라는 체제가 이론은 어떨지 모르지만(나는 아직 레닌이나 마르크스를 읽지 않았다) 실제는 모조리 실패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것은 공산주의가 가족을 해체하고 인간을 기계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시켰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는 점이다. 가족이 해체되자 사람들은 삶을 더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유형지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쓸 수 없었다면, 혹은 다시 만날 날을 꿈꾸지 못했다면 그들은 살아갈 이유가 없었을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체제는 없으며 조금씩 수정되고 보완되야 한다. 잘못된 길을 가면 거기에서 인간의 고통이 시작된다. 민주주의도 그런 고통을 겪었다. 어느 누군가는 민주주의나 자본주의가 완벽하다고 떠든다. 완벽한건 없다. 단지 다른 체제보다 조금 더 나았던것 뿐이다. 그래서 잘못된 체제와 미치광이 지도자, 굽신거리는 정치인과 관료, 속삭이는 사람들이 이 거대한 비극을 나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번이나 울었다. 그건 이 모순된 체제 안에서 개인이 어떤 감정을 느꼈느지 희미하게나마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6. 01:18


게으름에 대한 찬양

저자
버트런드 러셀 지음
출판사
사회평론 | 2005-04-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산업사회가 낳은 인간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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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책을 한권 읽으려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인기 없는 에세이>를 도서관에 신청해 놓고 여태 읽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 독서 모임 숙제책이라, 전에도 말했듯이 일단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은 강제로 읽게 된다. 그 책이 내 취향의 책이 아니더라도 투표에 의해 결정되었고 모임에서 내가 뭘 느꼈는지 얘기하려면 읽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억지로 읽는건 아니다. 다만, 읽을 책이 너무 많고 내가 책을 읽는 속도가 무척 느리며, 또 나의 독서의 범위가 비좁기 때문에, 이런 강제적인 읽기가 참 유익할 때가 많다. 이번에도 그렇다. 러셀의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읽지 못했던것은 철학이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릴 때 주변에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얘기하면서 그런 편견이 생긴것 같다. 그때 짧은 생각으론 철학이란게 별 시덥지 않은 것을 괜히 부풀려 복잡하게 생각하는 말장난 정도로 여겼던것 같다. 편견은 그대로 두면 둘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서 나중엔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철학에 관련된 책은 기피했던것 같다. 근데 막상 읽어보니 러셀의 책은, 물론 철학적인 부분도 꽤 나와서 읽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철학자의 책이라기 보다는 학자로써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사회와 정치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이 담겨 있었다. 약간 아쉬운 점은 이 책의 초판이 오래된 판본이고 개정판에서 얼마나 다듬었는지는 모르나 지나친 직역 때문인지,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번역투의 문장이 너무 많았고 어떤 문장은 몇번을 읽어야 겨우 이해할 정도로 아주 비효율적이였다. 사실 번역에 대한 생각은 다양할 수 있다. 그래서 원문에 가까운, 직역을 선호할 수도 있어서 지나치게 우리말로 의역을 한것을 싫어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는 책에 따라 다른데, 아쉬운건 러셀의 문장이 아주 좋은데, 그런 좋은 문장을 살리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고 또 아무리 직역에 중점을 둔다고 해도 한국 사람이 읽는 책이고 그것이 국어 문장인데 한두번 읽었을 때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어도 외국어도 아닌, 전혀 다른, 정의조차 할 수 없는 괴상망측한 언어가 아닐까? 그래서 번역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번역은 참 아쉽다.

 

러셀(1872-1970)의 글을 읽다보니 지난해 읽었던 조지 오웰(1903-1950)의 두 권의 책, 에세이집과 르포르타주가 연상되었다. 두 사람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고, 둘 다 엄청난 양의 원고를 남겼으며, 조지 오웰의 경우 우리는 소설만 썼다고 생각하지만 엄청난 양의 사설과 에세이를 남겼다. 번역이 안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둘 다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이며, 또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재미난 점은 그러면서도 약간 다른 점이라면 러셀은 약간 더 이상적인 느낌이 드는데, 러셀의 꿈꾸는 세상은 약간 이상적이며, 조금은 이론적이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든다. 그에 비해 조지 오웰은 좀 더 현실적이며 비판적이다. 물론 러셀도 비판적이지만 오웰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상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이건 단순한 추측이지만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직접 뛰어 들어, 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행이도 러셀의 에세이는 번역이 무척 많이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읽어 볼 기회가 많을것 같다. (상대적으로 조지 오웰의 에세이 번역은 빈약하다. 사실 러셀도 글을 잘 쓰지만.... 조지 오웰은 전업작가니...ㅎㅎㅎ)

 

책의 표제작인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사실 제목과 글 내용은 그 느낌이 무척 다르다. 나는 제목만 보았을 때 여유를 갖고 살자라는 철학자의 강의 정도 인줄 알았는데, 우리 시대에 악덕한 기업이 왜 그렇게 부를 축척하는지 또 왜 보통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지에 대한 글이었다. 이 글을 읽는 도중 내가 놀란것은 최근에 다양한 독서를 하면서 정리가 안되었던 생각들을 이 짧은 글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역시 아는게 많은 사람의 글을 다르구나 그런 생각도 들면서,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최근에 무슨무슨 강연이나 멘토니 힐링이니 하는것과 관련된 책을 엄청 싫어했다. 어느정도냐면 그런 책은 절대 볼 생각도 안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그런 요약이 뻔하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면도 있고 아닌 면도 있는것 같다. 왜냐하면 어떤 진리든 그것은 단순하지 않으며, 그렇게 짧은 시간에 깨우칠 수도 없으며 길고 다양한 사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유는 폭넓은 독서, 또 세상이나 사물, 사건을 바라보는 직관에서 이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는 모든 책들에서 우리는 진실을 발견한다. 어떤 형태든, 비소설은 물론이고 소설책을 읽으면서도 발견한다. 최근에 그렇게 유행을 타는 인문학이 인문학책에서만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소설책에서도 당연히 얻고 심지어 동물학책에서도 역사책에서도 각종 책에서 얻을 수 있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읽고 경험한 후에나 우리는 진실에 접근하고 감동을 할 수 있는데... 요즘에는 감동했다는 말이 너무 편하고 너무 무분별하다. 아무때나 튀어나고 아무때나 치유를 했다는 말이 나오며 감동을 했다는 말을 하고 진실에 접근했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것들이 너무 인기 있는 한 사람에 의존하는게 싫어서, 나는 그런 책을 읽지 않았다. 물론 그런 책을 쓴 사람은 나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더 폭넓은 사유를 하고 뭐든 더 뛰어나기 때문에, 그들이 쓴 책을 읽는 것은 분명히 유익할 것이다. 러셀의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지 거기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다. 러셀의 글안에 모든 주장을 내가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며 대체로 수긍하지만 어떤것은 나와 생각이 다들 수 있는데, 요즘은 너무 맹목적이지 않나 싶다. 앞서 말했지만... 다양한 책 속에 진리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을 통해 올바른 사유를 하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못하는 것이다. 즉석요리를 사서 먹는것이 진짜 요리를 하는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부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스님들이 부처의 말에 감동하고 그 말들을 외우고 또 외운다고 해도 진리를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러셀의 다른 책을 또 읽어 볼 작정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가 마주하는 부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좋은 대답이 될것 같다. 꼭 정치, 사회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이 철학자의 글은 사소한 것들도 아주 흥미롭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4.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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