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교수님 출연한 팟케스트 방송 올립니다. 시간 날때 들어보세요.

(오디오 방송이에요.ㅎㅎㅎ)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7. 26. 08:36

언젠가 읽었던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 를 필사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인터넷만 찾아봐도 많이 나오기는 하는데요;;; 

미욱하지만 그래도 카뮈를 읽음김에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 올려봅니다.


알베르 카뮈, 덕우 출판사


시지프스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되돌아옴, 이 정지인 것이다. 바로 바위 곁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이다. 나는 이 인간이 무거운, 그러나 종말을 모르는 고통을 향해 똑같은 걸음으로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그리고 그의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조금씩 조금씩 신들의 은신처로 내려가는 순간순간에 시지프스는 그의 운명의 면에서 볼 때보다 우세해지는 것이다. 그는 바위보다 더 굳세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에 눈이 떠져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이 바위를 밀어올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마다 그를 떠받치고 있다고 하면 그의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 운명은 시지프스 못지 않게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가 비극적인 것은 그가 의식적으로 되는 짧은 순간뿐이다. 그러나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인 시지프스는 무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항하는 시지프스는 자신의 비참한 존재상황을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다. 실로 이 비참한 존재방식을 그는 하산하는 도중 줄곧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괴롭히고 있는 통찰력이 그의 승리를 완벽한 것으로 만든다. 모멸에 의해서 넘어설 수 없는 운명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하산이 고통 속에 이루어지는 날도 있지만 그것이 희열 속에 이루어지는 날도 있다. 여기에서 희열이라는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시 한번 나는 그려본다. 시지프스는 자신의 바위 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에는 고통이었다. 저 지상의 여러 가지 영상이 너무나 강하게 기억에 새겨져 있을 때와 행복의 부름이 너무도 격하게 행해질 때 비애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용솟음쳐 오르는 경우가 있다. 이는 곧 바위의 승리이다. 아니, 바위 그 자체인 것이다. 한없이 비참한 경우에는 이를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무겁다. 이것이 우리들의 겟세마네의 밤이다. 그러나 인간을 답살하는 진리는 인식됨으로써 소멸한다. 오이디푸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오이디푸스는 처음에는 그것을 무르고 운명에 따랐다. 그가 운명을 안 그 순간부터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눈이 멀어 절망한 그는 자신을 이 세계에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 젊은 처녀의 생기에 넘치는 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터무니없는 말이 들려온다. “이토록 엄청난 시련을 받더라도 나의 늙음과 내 혼의 위대함은 나에게 이렇게 판단하게 한다. 모든 것이 좋다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승리를 이렇게 정식화한다. 고대의 예지가 근대의 영웅적인 자세와 합치한다.

부조리를 발견한 인간은 누구나 다 무엇인가 “행복으로의 안내인”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하여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왜 그렇게 좁은 길을 걷고 있느냐고……” 그러나 세계는 하나밖에 없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하나의 대지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다. 이 둘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 행복이 부조리한 발견에서 필연적으로 생긴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행복으로부터 부조리한 감정이 발생한다는 것도 분명히 가끔은 있다. “나는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고 오이디푸스는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부조리한 정신에 있어서는) 실로 외경해야 할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의 잔혹하고 유한한 우주에 울려퍼진다. 이 말은 모든 것은 아직 고갈되지 않았고 예전에도 고갈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말은 불만족감과 무익한 고통으로의 지향을 함께 갖고 이 세계에 들어와 있는 신을 그곳에서 추방한다. 이 말은 운명을 인간이 변화시켜야 할 것으로,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바꾼다.

시지프스의 말없는 모든 기쁨이 거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손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소유물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책고를 응시할 때에 모든 우상들을 침묵시킨다. 돌연히 침묵으로 돌아간 우주 속에서 조그마한, 그러나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감탄의 소리가 대지에서 분출되어 나온다. 무의식적이고도 비밀스러운 부름, 모든 모습들의 초청은 승리의 필연적인 이면이며 대가이다.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 태양은 없으며 또한 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부조리한 인간은 “좋다” 고 말한다. 그의 노력은 이미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각자의 운명이 있겠지만 인간을 초월한 숙명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그러한 숙명은 단 하나밖에 없으며 더구나 그 숙명이란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마땅히 경멸해야 될 것이라고 부조리한 인간은 판단하고 있다. 그 이외에 대하여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하루하루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그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스는 자신의 바위 쪽으로 돌아가면서 저 상호 무관한 일련의 행동이 바로 그 자신의 운명이 된다는 것과 그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자신의 기억의 시선 아래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마침내는 그의 죽음에 의하여 봉인될 운명으로 바뀐다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적인 모든 것이 모든 인간의 근원을 확신하는, 보고 싶지만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 장님, 그는 늘 움직이고 있다. 바위는 또 다시 굴러떨어진다.

나는 시지프스를 산기슭에 남겨 둔다! 인간은 언제나 반복하여 거듭 자신의 무거운 짐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올리는 것보다 고차원적인 충실함을 인간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도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이미 지배자가 없는 이 우주는 쓸모가 없는 것이라든지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가, 어두운 밤으로 둘러싸인 그 산의 광물질의 빛남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상을 향한 투쟁, 다만 이것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한 것이다.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7. 5. 21:16

역시 스파크노트 참조해서 작성해 봤습니다.

1. "부조리"한 세계관이 <이방인>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부조리"에 대한 각 등장인물들의 반응은?

저자는 <이방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누락함으로써 세계의 부조리함을 표현한다. 대표적인 예가 주인공이 아랍인을 죽이는 이유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로, 주인공은 아랍인에 대해 살의를 품을 이유가 전혀 없으며, 그럴듯한 변명을 지어내지도 않는다. 여기서 일어난 살인은 순전히 우연하게 일어난, 목적이 없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어머니 장례식에서 토마스 페레즈가 걸어가면서 힘들어하는 장면도 있는데, 그는 죽은 이에 대해 슬퍼할 만한 유일한 인물이지만 장례 행렬에 맞춰 걸어갈 능력이 없다는 모순이 표출된다. 그의 감정은 장례 행렬과 함께 움직이고 싶지만 실제 상황은 걷기 힘들어 좌절에 이른다. 세번 째로 주인공의 재판 바로 전에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의 재판이 열렸다는 상황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재판 스케줄이 잡힌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만, 주인공의 재판에서 검사는 이것을 소재로 삼아 주인공의 행위가 근친살인 등 패륜범죄의 촉발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주인공은 보다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각 등장인물은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저항한다.


2. 주인공과 마리가 서로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비교해보자.

주인공은 마리의 신체 특징에 집중하고 성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마리와의 관계를 육체적인 것으로 본다. 반복해서 마리의 외모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두 사람이 같이 있을 때도 신체 접촉 이외에는 거의 다른 묘사가 없다. 주인공에게 정신적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마리가 물어볼 때 두번 다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하고, 결혼 이야기도 깊은 생각 없이 쉽게 결정한다. 반면 마리는 주인공에 대해 정신적, 감정적으로 끌리며, 그의 사랑을 추구한다. 주인공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감옥에 있을 때도 마리는 주인공을 정신적으로 그리워하지만, 주인공은 육체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할 뿐 마리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3. 주인공과 레이몽은 어떻게 서로 다른가? 또한 어떤 비슷한 면이 있는가?

주인공과 레이몽 정반대의 인물처럼 보인다. 레이몽이 능동적이고 폭력성이 있는데 반해 주인공은 수동적이고 항상 평정을 잃지 않는다. 레이몽은 애인을 폭행하고 난폭하게 다루지만 주인공은 마리나 다른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층 들어가보면 레이몽은 그만큼 애인에 대해 깊은 감정이 있기 때문에 배신당했을 때 분노하고 폭력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주인공은 마리와의 관계에서 그런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되는 한편 공통점도 있다. 둘 다 사회에서 겉도는 존재, 즉 "이방인"이며 "비정상"적 존재이다. 레이몽은 포주로 사회에서 멸시받는 존재이다. 주인공과 레이몽은 모두 세상의 바깥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일종의 유대감이 형성되는 것이다.

4. 주인공은 어떤 과정을 거쳐 "세상의 예의바른 무관심"을 받아들이게 되는가? 이것을 깨닫는 계기는 무엇인가? 이 과정을 예고하는 장치로 어떤 사건/상황이 있는가?

5. <이방인>의 등장인물 묘사는 모두 주인공의 1인칭 관점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 묘사가 별로 친절하지 않다. 주인공에 의해 주어지는 정보만을 근거로 해서 마리, 레이몽 등 등장인물을 분석해 보자. 이들 인물의 인성에 대해 주인공은 어떻게 관찰하고 있나?

6. 살라마노와 개의 관계를 주인공과 마리의 관계 사이에 어떤 공통점 및 상반점이 있는가? 어느 쪽이 더 애정이 깊은 관계인가?

7. <이방인>의 문체를 논의해보자. 주인공의 말투는 대상, 상황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 스토리 전개에 따라 말투가 변화하는가? 전반부에 사용된 산문체는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8. <이방인>의 주인공은 정말 사회에 위협이 되는 인물인가? 그의 범죄행위에 비해 사형 판결은 정당한가?
명백한 동기에 의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가?

9. 주인공은 감옥에서 오래전 신문기사를 읽는데 어머니와 누이에 의해 살해당한 체코슬로바키아 사람 이야기이다. 이 기사 내용은 주인공의 살해 행위 및 재판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 기사 내용은 저자의 부조리 철학 사상을 어떻게 뒷받침하는가?

10. 주인공이 해변을 걸어가 아랍인을 죽이게 되기까지의 장면을 분석해보자. 이전 장면과 문체, 묘사에서 구분되는가? 큰 사건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긴장감이 조성되는가? 주인공은 햇빛이 눈부셔서 총을 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타당한 설명인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24. 19:42

백만년 만에 글 올려봅니다. 이 내용은 sparknotes.com을 참고해서 대략 작성한 겁니다.

알베르 카뮈와 부조리 철학(The absurd)

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아(Algeria)에서 태어났다. 1차 대전 참전 중이던 아버지가 1914년 사망하여 카뮈, 형들, 어머니, 외할머니, 외삼촌(전신마비환자) 이 모든 식구가 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매우 빈곤하게 생활했다. 온갖 알바를 하며 겨우 대학을 다녔지만 결핵 때문에 중퇴했고, 극심한 가난과 병의 고통이 훗날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학 중퇴 후 반식민주의 신문에서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며 가난에 쩌든 알제리아의 참상을 알리는 글을 썼다. 1935-1938년에는 극단 (Théâtre de l’Equipe)를 운영하며 노동자 계층을 관객으로 하는 공연을 열었다. 2차 대전 중 파리로 이주해서 글을 통해 군사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을 주도했으며 지하신문 콩바(Combat) 의 편집장을 맡았다.

전쟁 중 파리에서 "부조리不條理 사상(the absurd)"이라는 철학을 일으켰다. 인생은 부조리, 불합리, 무의미하다는 사상으로 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의 많은 지식인이 동조했다. 나치의 공포정치와 학살을 목격하고 나니 인간의 존재를 깊이 회의하게 되어 존재 자체가 부조리하다(absurd =말도 안된다, 어처구니 없다, 황당무계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방인>(1942년)은 카뮈의 첫 소설로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통해 부조리 세계관을 극명히 드러낸다. 주인공은 감정적, 도덕적으로 메마른 청년으로 어머니가 죽어도 울지 않고,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며 결국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사형에 처해진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세상의 예의바른 무관심(gentle indifference of the world)"을 받아들이게 되고, 담담히 자기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함과 함께 자신을 처단하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인다.

카뮈의 부조리 철학관에 의하면 세상에는 도덕적 질서가 존재하지 않고, 인간 사회에는 어떤 타당성이나 자연적 근거가 없다. 그렇지만 카뮈가 세상을 무관심만으로 대한 것은 아니다. 인생에 "숭고한" 의미가 없는 것은 맞지만 그 때문에 반드시 인간이 절망으로 내달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차갑고 무관심한 세상" 속에서도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은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1942년 한 해에 <이방인>과 <시시포스 신화>(철학 에세이) 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학적 명성을 확고히 다졌다. 이후 여러 소설, 희곡, 에세이를 내놓으며 더욱 심화된 부조리 철학을 펼쳤다. 대표작으로 소설 <페스트>(1947)와 <타락>(1956), 철학 에세이 <반역자>가 있다.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3년 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전쟁 후 혼돈에 빠진 유럽의 지식사회에서 카뮈는 정의와 인간성을 옹호하는 목소리였다. 때이른 죽음으로 짧은 삶이었지만 20세기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고, 픽션 작품의 문학적 가치는 물론 깊이 있는 철학을 펼친 사상가로서도 높이 평가된다.

<이방인>과 실존주의

<이방인>을 실존주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부정확한 견해이다. "실존적"이라는 말은 포괄적 의미로 광범위하게 적용되다 보니 그 뜻을 제대로 모르고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경우도 많다. 일반적인 의미로 "실존적"의 정의는 "세상 또는 인간(존재)에게 숭고한 의미란 없으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논리정연한 이치가 없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생명에 추구할 만한 숭고한 목적이 없으며, 오로지 육체적(물리적) 존재 이상의 가치는 없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철학 계파로서의 실존주의는 이러한 일반적 정의 차원을 넘어 보다 복합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이방인>의 사상은 일반적인 "실존적" 정의에는 부합하지만 실존주의 철학파와는 구별된다. 저자 카뮈도 <이방인>에 "실존적"이라는 말을 연결하는 것을 거부했다. 따라서 <이방인>은 실존주의가 아니라 부조리 사상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 옳다. "부조리 철학"은 카뮈가 직접 붙인 명칭으로 이 사상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방인>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방인>이 카뮈의 부조리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 작품이 소설이며 철학논문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자는 <이방인>을 읽으면서 근본 사상뿐 아니라 등장인물 묘사, 스토리 전개, 산문 스타일 등 문학적 요소에도 주목해야 한다. 소설 작품에서 철학 사상은 책 내용과 따로 떼어낼 수 없고, 어디까지나 책 내용의 이해를 돕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6. 24. 19:39

* <내 이름은 빨강>과 관련한 자료입니다.

*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비흐자드 <유수프의 유혹>, 1488

종이에 잉크와 물감, 30 x 22cm, 카이로 국립도서관

 

‘줄라이하’는 남편의 독실한 하인, 유수프(요셉)를 갈망했던 귀부인이다. ‘줄라이하’는 기능공을 고용하여 유수프를 유혹하기 위한 저택을 호화롭게 짓도록 했다. 그리고 계속 뒤에서 문을 닫으며 그 아름다운 청년을 저택의 방 안으로 유혹했다. 마침내 ‘줄라이하’가 그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순간, 신을 기억한 유수프는 신의 도움으로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 미술 - 줄리언 벨 P.175

 

<코란>이 없어서 성경을 읽어봤는데, 성경은 약간 내용이 다르다. 좀 더 평범하달까. 같은 사건을 다루지만 복잡하고 화려한 집이나 하나씩 닫히는 신비한 문은 없고 그냥 요셉이 유혹을 뿌리치며 도망치다가 옷이 벗겨지는데 나중에 그 옷을 증거로 자신을 겁탈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나중에 서점가면 코란을 살펴봐야겠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그림을 뚫어지게 한번 쳐다보자굉장히 독특하지 않는가? 여러분은 지금 복잡하고 화려한 ‘보디발’의 아내(줄라이하)가 지은 집안을 들려다 보고 있다. 마치 신의 눈처럼 벽을 투사하고 복잡한 구조를 단순하게 해체해 놓은 평면을 쳐다보고 있다. 그 안에 극적인 사건과 마주한다. 남편이 총애하는 젊고 잘생긴 하인을 유혹하는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듯 그를 붙잡고 있고 이제 막 그 젊은이(요셉)는 탈출을 하려는 순간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약 당신이 화가라고 가정해보자. 아니면 뭐 일러스트 작가라던가. 누가 이 복잡하고 신비한 이야기를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했다고 치자. 어떻게 그려야 할까난감해지기 시작한다. 화려하고 복잡한 대저택을 그리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 불륜?극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보여줘야 할까?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쯤에 터키의 한 화가는 정말 기묘하게 이 이야기를 해체 시키고 나서 다시 멋지게 결합해서 우리 앞에 내놓는다.

 

팩맨(Pac-Man), 1980, 남코가 제작한 게임

 

<팩맨>이란 게임을 살펴보자. 되게 단순한 게임이다. 갑자기 <팩맨>이냐? 하겠지만 보면 이 <팩맨>의 배경이 되는 곳은 아주 복잡한 미로 같은 건물이란 걸 알 수 있다. 벽이 엄청나게 많으며 긴 복도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 적은 가운데 방에 모여 있다가 한 녀석씩 튀어나온다. 잘 관찰해보면 우리가 이 복잡한 건물을 위에서 쳐다본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팩맨’과 ‘악당 4종 세트’는 어떤가? 위에서 쳐다보는 모습일까? 아니다. 옆에서 쳐다보는 거다. 왜 이 게임은 일관성 없게 캐릭터를 위에서 쳐다본 모양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대답은 매우 단순하다. 화면을 보는 사람이 각각의 사물(건물과 ‘팩맨’, 악당)을 최대한 잘 파악할 수 있는 시선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그림은 우리가 이집트 그림을 볼 때 흔하게 접할 수 있다. (관련 포스팅 : 수천년간 이어지는 형식과 영감을 참고)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보통 이렇게 그린다. 사물을 관찰자가 보기 쉽게 하려고 원근법이나 투시법을 모두 무시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이가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그림 기술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단 그렇게 그리는 것이 관찰자에게 사물의 외형이나 그림 속에 이야기를 더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에게 그런 기술이 없기도 하다.)

 

우리가 본 <유수프의 유혹>은 이런 예보다 한층 더 복잡하며 기묘하다. 마치 어렸을 때 죨리 게임에 들어 있는 3차원 종이판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종이판은 건물을 평면으로 해체해 놓았지만, 조립을 하면 불안전한 입체로 재결합된다.

 

<유수프의 유혹>로 검색하면 딴 건 거의 없고 지겹게 <내 이름은 빨강>이란 책 제목이 검색되어 나온다. 별 내용도 없이 단순히 이 그림이 그 책의 표지로 쓰였다는 거 빼곤 아무런 정보가 없다. 물론 요셉의 유혹은 기독교에서 자주 다루는 것 같다. 뭐 코란에서처럼 신비한 부분은 없으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부인의 유혹은 사탄의 유혹과 동일시된다. 성경에서 이 유혹은 요셉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스스로 그 유혹을 이겨냈으며 코란에서처럼 신이 개입한 것은 아니다. (뭐 코란을 좀 읽어봐야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겠지만….) 어쨌든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그림은 아래 그림인 <눈뜨는 양심>을 떠올리게 한다. 약간은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윌리엄 홀먼 헌트 <눈 뜨는 양심>, 1853년

컨버스에 오일, 76.2 X 55.9cm. 런던 데이트 미술관

 

창녀는 어느 날 창으로 들어온 눈부신 빛을 보고 양심에 눈을 뜬다는 다소 뻔한 그림인데, 재밌는 점은 왜 양심에 눈을 뜬다면 그녀를 무릎에 앉 남자가 떠야지 저 소녀가 뜨느냐 이 말이다. 물론 뭐 굳이 떠야 한다면 둘 다 떠야겠지만, 어쨌든 <유수프의 유혹>의 기묘하고 거대한 저택은 꼭 우리의 욕망과 닮은 구석이 많다. (<내 이름은 빨강>의 저자 '오르한 파묵'은 이 저택이 '인간의 욕망만큼 거대하다.'라고 말한다.) 그림은 신의 도움이든 아님 혼자서 지켜낸것이든 유수프(요셉)가 그 욕망을 이겨내는 장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며 ‘그 번잡한 욕망을 헤매고 다닐 우리가 그것을 뿌리칠 수 있는가?’하고 반문한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 3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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