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스러운 고백

저자
박완서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5-01-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그리운 이름, 박완서 살아 있는 목소리로 다시 만나다!한국 현대...
가격비교

 

77년에 발표한 박완서작가의 첫 산문집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를 재편집한 책이다. 작가가 떠난지 4주기를 맞아 7권의 산문 전집이 나왔다. 표지는 작가의 유품을 찍은 사진으로 디자인한것이라고 하니, 작가를 아끼는 분들에게 남다르게 느껴질것 같다. 책 자체도 예쁘게 잘 나왔다. 판형도 아담해서 한손에 쏙 들어오고 본문 편집도 예쁘다. 튼튼한 양장에 제본도 아주 잘되어서 신경을 많이 썼구나 싶다.
표제작은 왜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쑥스러운 고백>으로 바꿨는지, 책을 다 읽고 나니 알것 같다. 분명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는 아주 강렬한 산문이여서 표제작으로 충분히 손색이 없지만, 지금은 이 책이 발표된지 40년이 다 되어 가기 때문에, 이 산문집 전체의 느낌을 대표할 수 있는 표제작으로 아마도 <쑥스러운 고백>이 잘 맞지 않았을까? 당시 작가는 데뷰한지 7년밖에 안되었고 많은 글에서 자기 고백과 성찰이 엿보인다. 작가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또 한 여자로서 그 시대, 1970년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는데,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지금와 읽어보면 무척이나 새롭게 느껴졌다. 지난 몇년전부터 갑자기 복고 바람이 불었는데, 드라마라던가 영화에서 그런 복고 코드가 유행인듯 하다. 거기에 사회도 약간 꺼꾸러 흘러가는 기분이라 그런지 더욱더 복고가 유행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그걸 추억거리로 치부하는 것까지는 상관이 없겠지만, 그것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좀 우숩다. 물론 과거의 역사를 우숩게 보는게 아니다. 그저 그 옛날이 좋았지, 라던가 혹은 그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게 웃길 뿐이다. 과거로 돌아가는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만큼 억지스러운게 또 있을까. 그저 우리는 과거를 쳐다볼 뿐이다. 이 산문집은 70년대 이야기로 가득차있다. 내가 태어나기전에 일들이기 때문에, 대부분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분들도 해당될꺼라 생각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왠지 친숙하기도 또 낯설기도하다. 친숙한것은 앞서 말한 드라마와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친숙하기 때문이다. 마치 공연을 하기 위해 만든 무대장치처럼, 70년대나 80년대의 이미지가 있다면, 작가가 실제로 느끼고 기술한 산문은 그 이미지와는 또 달라서 낯설게 느껴진다. 첫 산문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 등장하는 버스안내양을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블로그에 주로 들어오는 연령이 20대, 30대, 10대 순으로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아마도 영화속이나 드라마에서나 봤을 것이다. 나도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 버스안내양에 대한 기억이 있긴 한데, 그것조차도 기억이 또렷해지는 나이가 됐을때는 이미 다 사라졌다. 친숙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낯설었고, 또 낯설다고 했지만, 왠지 상당수 많은 부분은 또 요즘의 우리 사회를 연상케 하는 부분도 있다. 200년쯤 전에 쓴 <목민심서>에서도 다산은 머릿말에서, 당시 조선이 성인의 시대와 그 거리가 멀어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거둬들이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 모른다고 한탄한다. 책 전체에서 우리 사회, 그것도 군주제가 아닌 민주주의 사회에서 흔한 타락과 부폐와 쏙 빼닮은 부정들을 지적한다. 그러니 나라의 거대 여당의 수장이 왜 기업이 부정하고 정치인과 공직자가 부패한가?라는 질문의 해답으로 국민 복지의 과잉을 그 이유로 내세우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백성을 기른다, 즉 백성을 양육하는, 지금에 와서는 국민을 섬기고 잘 보살펴야할 의무를 지는 자의 몰상식함은 왜 예전이나 지금이 똑같을까? 어쩌면 조금씩 변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느끼기엔 너무 더딘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박완서작가의 글을 읽을 때, 가장 좋은 부분은 작가와 세대차이가 많이 남에도 불구하고, 또 이처럼 우리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있다. 첫 산문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우리는 마라톤 하위 그룹에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는 작가를 발견한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나는 스포츠 경기에 늘 시들하다. 챙겨 보지도 않고 열열하게 응원하는 팀도 없다. 그러나 가끔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가족이나 식구와 함께 티비를 보다가 열열히 응원하고 박수를 칠때가 있다. 그 경기가 꼭 결승전은 아닐때도 많다. 게다가 그것은 집단애국의 발로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다. 순위에 상관없이 노력했던 한 인간에게 보내는 갈채이기도 하지만, 어쩌다 한번 열광을 하고 싶을 때, 불완전한 동질감을 느끼고 싶을 때, 그저 한바탕 박수를 쳐서 응원을 하고 싶을 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것 뿐이다. 작가의 글을 조근조근 읽다보면 이런 뜻밖의 공감을 발견할 때가 자주 있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작가의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즐거움이 아닐까?
우리는 70년대를 살아내지 않았고 (물론 70년대를 살아낸 분들도 이 글을 볼것이다.) 그 안에서 작가가 느꼈을 것들을 이렇게 좋은 문장과 좋은 편집으로 만나 볼 수 있다. 그 시대 작가가 느낀 시대상, 각종 사건들, 여성운동에 대하여, 교육열에 대하여, 도시의 주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늦깍기 작가의 첫번째 산문집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나는 이 서평을 쓰기전에, 어떻게 쓸까 궁리를 했는데, 작가의 좋은 문장들, 또 인상 깊은 구절을 몇개 넣어서 써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런게 너무 많다. 어떤걸 골라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렇다고 그 문장만 쏙 빼서, 혹은 한 단락만 쏙 빼서 넣는것도 전체의 느낌을 다 전달하기 어려울것 같았다.
표제작 <쑥스러운 고백>에서 작가는 여공(女工)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총력을 다해 추구하고 있는 번영이 결코 어느 특정인을 위한 거나 또는 외국 관광객을 위한 전시용이 아닌, 우리 모두가 잘살기 위한 진정한 의미의 번영일진데 여러분이 여러분의 근로에 충분한 보답을 받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으리라는 걸 믿으며 거의 기도하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렇게 돼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돼어가는 과정이라면 과정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치르지 않는 부정이 너무 많다. 그것은 명백한 기업주의 부정인데도 앞서 말했듯이 집권당의 대표는 그 기업주를 비난하거나 그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뿐더라 그것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있다고도 하고 또 복지의 과잉이라고도 하는 괴변을 늘어놓았다. 한때 근면한 노동은 좋은 선전거리였다. 그것은 아직도 이용되고 있다. 때론 상업적인 추억팔이로 이용되며 또 한편으론 무언가를 억압하려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과거의 부모세대의 노력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노력이 온전히 그들에게 돌아갔는가를 반문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온전히 쓰였다면,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 더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박완서작가의 글에서 시대를 초월한 공감이 앞서 좋기 때문에 작가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또 하나 추가하자면 작가가 왜 글을 쓰는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확고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산문 <나는 왜 소설가인가>의 한구절에 그 부분이 명확하게 들어나 있다. 이 또한 내가 작가를 사랑하는 두번째 이유기도 하다.

"내가 인간이기에 인간 같지 않은 인간과 그런 인간을 만들어낸 시대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구를, 그 후에 쓴 소설을 통해서도 내가 살아온 분단 시대. 산업화, 정보화 시대가 어떻게 인간성을 속물화, 황폐화시켜가는가를 증언하는 걸로 일관되게 유지돼왔다. 또한 이 나이까지 꾸준히 소설을 써온 건, 이야기가 지닌 살아낼 수 있는 힘과 위안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22. 1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