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고양이

저자
스테파노 추피 지음
출판사
예경 | 2012-11-30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호화로운 귀족의 저택, 소박한 농부의 오두막, 가진 것 하나 없...
가격비교

 

스테파노 추피의 미술 책이 국내에 꽤 번역이 되었다. 그렇게 보면 국내에서 꽤 인기있는 작가인듯 하다. 비교적 대중적인 미술책들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천년의 그림 여행>을 샀다가 아는 지인에게 선물로 줬는데, 그 책은 도판도 예쁘고 내용도 나쁘지 않지만, 약간 내용이 심심했다. 이 책은 고양이가 등장하는 그림이 시대별로 쭉 보여주는데, 도판이 참 많다. 기본적으로 도판이 많은 책을 선호한다. 곰브리치 교수도 서양미술사에서 가능한 더 많은 도판을 실으려고 했는데... 개정판을 내면서 도판의 수를 늘렸다. 이른바 설명하는 미술이 아니라 보여주는 미술을 원했던 것이다. 원화를 보기 힘든 상황에서 도판이 풍부한 미술책은 환영받을 만 하다. 게다가 요즘엔 도판 인쇄 품질도 훨씬 좋아졌으니깐, 웹에서 검색하면 다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웹에서 고해상도 도판을 찾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색이 문제다. 사실 인쇄된 도판도 원화랑 엄격히 비교해서 색감이 똑같은지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나.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어느정도 교정을 봤을테고... 웹에 올려진 그림들은 정말 색감이 제멋대로다. 같은 그림을 검색해도 여러 색상으로 제멋대로 보정?되었기 때문에... 어느것이 원화와 가까운지 알 길이 없다. 전적으로 미술책에 인쇄된 도판을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책을 만드는 사람들을 믿어 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미술책은 말그대로 고양이에 대한 책이다. 고대부터 현대미술까지 고양이가 등장하는 그림을 모아놨는데 작가의 간략한 설명이 지나치게 전문적이지 않으면서도 또 흠잡을 정도로 부실하지 않고 적당하다. 그래서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읽기 적당하다. 간혹 지나친 해석이 약간씩 있긴있다. 최대 장점이라면 페이지마다 도판이 있다는 점이다. 한장중에 한페이지는 도판이 있으니, 350페이지의 책 안에 방대한 도판을 구경할 수 있다. 풍부한 도판,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재미삼아 읽을만 하고 미술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고양이와 상관없이 흥미롭게 읽을 만 하다.

 

 

고양이는 사실 그림의 주제라보기 보단 과거엔 거의 장식적인 면이 강했다. 물론 풍자화에서 종종 주제로 부각되기는 하지만 대개 그림에서는 거의 장식이였다. 혹은 중세때는 상징으로 쓰였으나, 중세에는 고양이의 이미지가 부정적이라서 그림에 등장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이 그림은 펠릭스 발로통의 목판화로 1896년 작이다. 흔히 나비파 분류되는 화가인데, 아누르보 느낌도 나고, 무엇보다 이 도판이 굉장히 강렬해서 한참을 쳐다봤다. 고양이를 키우는 분들이라면 이런 장면이 낯익을 수도.... 과거에 고양이가 장식적인이였다면, 이 그림에서는 주제안에 들어와있다. 여기서 고양이를 빼버린다면 그림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발로통의 다른 그림에서도 비슷한 주제의 그림을 찾았다. 책을 읽다가 막 잠이 든 처자...ㅎㅎㅎ를 고양이가 잠들었는지 확인하려는 듯 침대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있다. 고양이는 저런 행동을 자주 하는데, 우리집 고양이도 소파에 누워있으면 손이나 얼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 듯한 행동을 취한다. 그러다가 차가운 코가 피부에 닿기도 하는데, 그러면 고양이가 뽀뽀라도 해주는 듯한 착각을 종종 하곤 한다. 이런 주제들은 고양이가 장식적인 요소에 그치지 않고 온전히 그림안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든다. 예를 들어 과거 그림들에서는 고양이는 다분히 장식적이다.

 

 

미술사 시기로 보자면 르네상스 시기에 그려진 페데리코 바로치의 수태고지에서 도판 하단에 고양이는 천사가 나타나서 임신을 알리는 중요한 시점에 완전히 잠에 빠져있다. 르네상스 시기지만, 화려한 파스텔톤의 색감을 제외하곤 중세 그림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창 밖풍경만 이채로울 뿐이다. (고대 나사렛 가정집 대신 화가의 고향인 우르비노 궁전을 묘사했다[각주:1]) 여기서 고양이는 평안한 집안을 상징하는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에서 고양이를 지운다고 해도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바로치의 그림보다 몇년 전에 그려진, 로렌초 로토의 그림은 지난번 '독특한 <수태고지> - 로렌초 로토

' 포스팅에서 한번 다룬적이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어느날 처녀의 방에 불쑥 나타난 천사에 놀라 도망가는 성모를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책의 저자(스테파노 추피)는 이 부분에서 성모처럼 놀라 도망가는 고양이를 악마적 전율에 대한 오랜 미신을 상기시켰다고 저술하고 있다.[각주:2]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내 짧은 미술의 지식에서는 그냥 고양이도 사람과 똑같이 놀라 달아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중세부터 고양이는 불길하게 보았으며, 집안에 숨어 있던 그 불길한 기운을 천사가 쫓아내는 장면으로도 보는것은 타당하다. 예를 들어 성모의 시선은 관람자를 보고 있으며, 그것은 완전히 놀란, 혹은 낯선 남자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순수함(천사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백합처럼)이라면 힐끗 도망치며 천사를 노려보는 고양이의 시선과는 다르다고 주장 할수도 있겠다. 이 장면 다음으로 소리치는 천사에 말에 성모는 뒤돌아볼것이며 천사를 확인한 후에는 수태고지를 받아드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고양이는 천사임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도망가는것을 중세로 부터 내려오는 고양이에 대한 악의적 해석으로 볼 수 있는것이다.

 

 

 

 

피에르 보나르가 1912년에 그린 <고양이와 함께 있는 여자>라는 그림을 보면, 더이상 고양이가 장식으로 쓰이지 않았다는걸 짐작케한다. 물론 고양이는 이 초상화의 장식일수도 있다. 그러나 화가가 그린 고양이는 어디서 스케치한 고양이를 가져다가 그림에 배치한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 수 있을것이다. 저 사랑스러운 고양이 특유의 자세로 여인 옆에 앉아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식탁에 발을 올려놓은 모습은 화가가 그 순간을 직접 스케치하지 않는한 그릴 수 없는 장면으로 그 시간, 그 공간에 같이 있었다는 증거로 더 이상 고양이가 장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것은 고양이가 미술사에서 그 위치가 확고해졌다던가 위상이 높아졌다는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것은 미술이 변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중세에는 그림의 모든 요소가 계산적이며 엄격한(아카데미의 규율) 원칙에 따라 그려졌고 배치되었지만(심지어 색도 규제를 받았다.), 인상주의 이후에 미술은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색을 칠했기 때문이다. 후에 다시 왜곡을 했지만... 어쨌든,

 

사실 책을 다 읽긴 했으나, 미술책은 다 읽는다는건 불가능하다. 특히나 도판이 많은 것은 도판을 구경한다는 것은 늘 시간이 걸리는 일이며, 새로운 시각에서 볼때마다 그림은 더 많은 다양한 가능성을 내제되어 있기 때문에, 다 봤다. 다 읽었다.라고 하기엔 좀 힘든 면이 있다.(그렇게 따지면 모든 책이 그렇겠지만, 도판을 보는 것은 훨씬 더 그런 면이 있다.) 그래서 미술책은 사서 두고두고 보고 싶어진다. 자매품처럼 그림속의 강아지가 있기 때문에, 고양이든 강아지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미술책도 보고 약간의 설명도 듣고 한번쯤 읽어 볼만한 책이다. 도판의 품질이야 말할것 없이 좋고 또 예경이라는 미술책 전문 출판사에서 나온것이니 믿을 만하다. 저자도 무척 유명한 사람이니 내용도 나쁘지 않다.

  1. 스테파노 추피, 그림 속의 고양이, 예경, p116 [본문으로]
  2. 스테파노 추피, 그림 속의 고양이, 예경, p335 [본문으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2. 1. 11:38

* <내 이름은 빨강>과 관련한 자료입니다.

*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비흐자드 <유수프의 유혹>, 1488

종이에 잉크와 물감, 30 x 22cm, 카이로 국립도서관

 

‘줄라이하’는 남편의 독실한 하인, 유수프(요셉)를 갈망했던 귀부인이다. ‘줄라이하’는 기능공을 고용하여 유수프를 유혹하기 위한 저택을 호화롭게 짓도록 했다. 그리고 계속 뒤에서 문을 닫으며 그 아름다운 청년을 저택의 방 안으로 유혹했다. 마침내 ‘줄라이하’가 그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순간, 신을 기억한 유수프는 신의 도움으로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 미술 - 줄리언 벨 P.175

 

<코란>이 없어서 성경을 읽어봤는데, 성경은 약간 내용이 다르다. 좀 더 평범하달까. 같은 사건을 다루지만 복잡하고 화려한 집이나 하나씩 닫히는 신비한 문은 없고 그냥 요셉이 유혹을 뿌리치며 도망치다가 옷이 벗겨지는데 나중에 그 옷을 증거로 자신을 겁탈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나중에 서점가면 코란을 살펴봐야겠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그림을 뚫어지게 한번 쳐다보자굉장히 독특하지 않는가? 여러분은 지금 복잡하고 화려한 ‘보디발’의 아내(줄라이하)가 지은 집안을 들려다 보고 있다. 마치 신의 눈처럼 벽을 투사하고 복잡한 구조를 단순하게 해체해 놓은 평면을 쳐다보고 있다. 그 안에 극적인 사건과 마주한다. 남편이 총애하는 젊고 잘생긴 하인을 유혹하는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듯 그를 붙잡고 있고 이제 막 그 젊은이(요셉)는 탈출을 하려는 순간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약 당신이 화가라고 가정해보자. 아니면 뭐 일러스트 작가라던가. 누가 이 복잡하고 신비한 이야기를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했다고 치자. 어떻게 그려야 할까난감해지기 시작한다. 화려하고 복잡한 대저택을 그리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 불륜?극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보여줘야 할까?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쯤에 터키의 한 화가는 정말 기묘하게 이 이야기를 해체 시키고 나서 다시 멋지게 결합해서 우리 앞에 내놓는다.

 

팩맨(Pac-Man), 1980, 남코가 제작한 게임

 

<팩맨>이란 게임을 살펴보자. 되게 단순한 게임이다. 갑자기 <팩맨>이냐? 하겠지만 보면 이 <팩맨>의 배경이 되는 곳은 아주 복잡한 미로 같은 건물이란 걸 알 수 있다. 벽이 엄청나게 많으며 긴 복도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 적은 가운데 방에 모여 있다가 한 녀석씩 튀어나온다. 잘 관찰해보면 우리가 이 복잡한 건물을 위에서 쳐다본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팩맨’과 ‘악당 4종 세트’는 어떤가? 위에서 쳐다보는 모습일까? 아니다. 옆에서 쳐다보는 거다. 왜 이 게임은 일관성 없게 캐릭터를 위에서 쳐다본 모양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대답은 매우 단순하다. 화면을 보는 사람이 각각의 사물(건물과 ‘팩맨’, 악당)을 최대한 잘 파악할 수 있는 시선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그림은 우리가 이집트 그림을 볼 때 흔하게 접할 수 있다. (관련 포스팅 : 수천년간 이어지는 형식과 영감을 참고)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보통 이렇게 그린다. 사물을 관찰자가 보기 쉽게 하려고 원근법이나 투시법을 모두 무시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이가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그림 기술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단 그렇게 그리는 것이 관찰자에게 사물의 외형이나 그림 속에 이야기를 더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에게 그런 기술이 없기도 하다.)

 

우리가 본 <유수프의 유혹>은 이런 예보다 한층 더 복잡하며 기묘하다. 마치 어렸을 때 죨리 게임에 들어 있는 3차원 종이판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종이판은 건물을 평면으로 해체해 놓았지만, 조립을 하면 불안전한 입체로 재결합된다.

 

<유수프의 유혹>로 검색하면 딴 건 거의 없고 지겹게 <내 이름은 빨강>이란 책 제목이 검색되어 나온다. 별 내용도 없이 단순히 이 그림이 그 책의 표지로 쓰였다는 거 빼곤 아무런 정보가 없다. 물론 요셉의 유혹은 기독교에서 자주 다루는 것 같다. 뭐 코란에서처럼 신비한 부분은 없으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부인의 유혹은 사탄의 유혹과 동일시된다. 성경에서 이 유혹은 요셉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스스로 그 유혹을 이겨냈으며 코란에서처럼 신이 개입한 것은 아니다. (뭐 코란을 좀 읽어봐야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겠지만….) 어쨌든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그림은 아래 그림인 <눈뜨는 양심>을 떠올리게 한다. 약간은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윌리엄 홀먼 헌트 <눈 뜨는 양심>, 1853년

컨버스에 오일, 76.2 X 55.9cm. 런던 데이트 미술관

 

창녀는 어느 날 창으로 들어온 눈부신 빛을 보고 양심에 눈을 뜬다는 다소 뻔한 그림인데, 재밌는 점은 왜 양심에 눈을 뜬다면 그녀를 무릎에 앉 남자가 떠야지 저 소녀가 뜨느냐 이 말이다. 물론 뭐 굳이 떠야 한다면 둘 다 떠야겠지만, 어쨌든 <유수프의 유혹>의 기묘하고 거대한 저택은 꼭 우리의 욕망과 닮은 구석이 많다. (<내 이름은 빨강>의 저자 '오르한 파묵'은 이 저택이 '인간의 욕망만큼 거대하다.'라고 말한다.) 그림은 신의 도움이든 아님 혼자서 지켜낸것이든 유수프(요셉)가 그 욕망을 이겨내는 장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며 ‘그 번잡한 욕망을 헤매고 다닐 우리가 그것을 뿌리칠 수 있는가?’하고 반문한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 3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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