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읽었던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 를 필사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인터넷만 찾아봐도 많이 나오기는 하는데요;;; 

미욱하지만 그래도 카뮈를 읽음김에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 올려봅니다.


알베르 카뮈, 덕우 출판사


시지프스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되돌아옴, 이 정지인 것이다. 바로 바위 곁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이다. 나는 이 인간이 무거운, 그러나 종말을 모르는 고통을 향해 똑같은 걸음으로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그리고 그의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조금씩 조금씩 신들의 은신처로 내려가는 순간순간에 시지프스는 그의 운명의 면에서 볼 때보다 우세해지는 것이다. 그는 바위보다 더 굳세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에 눈이 떠져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이 바위를 밀어올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마다 그를 떠받치고 있다고 하면 그의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 운명은 시지프스 못지 않게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가 비극적인 것은 그가 의식적으로 되는 짧은 순간뿐이다. 그러나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인 시지프스는 무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항하는 시지프스는 자신의 비참한 존재상황을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다. 실로 이 비참한 존재방식을 그는 하산하는 도중 줄곧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괴롭히고 있는 통찰력이 그의 승리를 완벽한 것으로 만든다. 모멸에 의해서 넘어설 수 없는 운명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하산이 고통 속에 이루어지는 날도 있지만 그것이 희열 속에 이루어지는 날도 있다. 여기에서 희열이라는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시 한번 나는 그려본다. 시지프스는 자신의 바위 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에는 고통이었다. 저 지상의 여러 가지 영상이 너무나 강하게 기억에 새겨져 있을 때와 행복의 부름이 너무도 격하게 행해질 때 비애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용솟음쳐 오르는 경우가 있다. 이는 곧 바위의 승리이다. 아니, 바위 그 자체인 것이다. 한없이 비참한 경우에는 이를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무겁다. 이것이 우리들의 겟세마네의 밤이다. 그러나 인간을 답살하는 진리는 인식됨으로써 소멸한다. 오이디푸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오이디푸스는 처음에는 그것을 무르고 운명에 따랐다. 그가 운명을 안 그 순간부터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눈이 멀어 절망한 그는 자신을 이 세계에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 젊은 처녀의 생기에 넘치는 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터무니없는 말이 들려온다. “이토록 엄청난 시련을 받더라도 나의 늙음과 내 혼의 위대함은 나에게 이렇게 판단하게 한다. 모든 것이 좋다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승리를 이렇게 정식화한다. 고대의 예지가 근대의 영웅적인 자세와 합치한다.

부조리를 발견한 인간은 누구나 다 무엇인가 “행복으로의 안내인”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하여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왜 그렇게 좁은 길을 걷고 있느냐고……” 그러나 세계는 하나밖에 없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하나의 대지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다. 이 둘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 행복이 부조리한 발견에서 필연적으로 생긴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행복으로부터 부조리한 감정이 발생한다는 것도 분명히 가끔은 있다. “나는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고 오이디푸스는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부조리한 정신에 있어서는) 실로 외경해야 할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의 잔혹하고 유한한 우주에 울려퍼진다. 이 말은 모든 것은 아직 고갈되지 않았고 예전에도 고갈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말은 불만족감과 무익한 고통으로의 지향을 함께 갖고 이 세계에 들어와 있는 신을 그곳에서 추방한다. 이 말은 운명을 인간이 변화시켜야 할 것으로,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바꾼다.

시지프스의 말없는 모든 기쁨이 거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손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소유물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책고를 응시할 때에 모든 우상들을 침묵시킨다. 돌연히 침묵으로 돌아간 우주 속에서 조그마한, 그러나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감탄의 소리가 대지에서 분출되어 나온다. 무의식적이고도 비밀스러운 부름, 모든 모습들의 초청은 승리의 필연적인 이면이며 대가이다.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 태양은 없으며 또한 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부조리한 인간은 “좋다” 고 말한다. 그의 노력은 이미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각자의 운명이 있겠지만 인간을 초월한 숙명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그러한 숙명은 단 하나밖에 없으며 더구나 그 숙명이란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마땅히 경멸해야 될 것이라고 부조리한 인간은 판단하고 있다. 그 이외에 대하여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하루하루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그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스는 자신의 바위 쪽으로 돌아가면서 저 상호 무관한 일련의 행동이 바로 그 자신의 운명이 된다는 것과 그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자신의 기억의 시선 아래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마침내는 그의 죽음에 의하여 봉인될 운명으로 바뀐다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적인 모든 것이 모든 인간의 근원을 확신하는, 보고 싶지만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 장님, 그는 늘 움직이고 있다. 바위는 또 다시 굴러떨어진다.

나는 시지프스를 산기슭에 남겨 둔다! 인간은 언제나 반복하여 거듭 자신의 무거운 짐을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올리는 것보다 고차원적인 충실함을 인간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도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이미 지배자가 없는 이 우주는 쓸모가 없는 것이라든지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가, 어두운 밤으로 둘러싸인 그 산의 광물질의 빛남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상을 향한 투쟁, 다만 이것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한 것이다.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7. 5. 21:16